한국일보

토착왜구와 남남갈등

2019-07-17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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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을 일으켜야 한다는 소리가 높다. 그 가운데 동학혁명을 상징하는 ‘죽창가’가 새삼 고창된다. “도쿄 한복판에 불꽃 타격투쟁 심정!”이라는 식의 섬뜩하고 호전적인 댓글들이 여기저기 난무하면서.

대통령은 자력갱생을 강조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이순신 장군을 거론했다. 불과 12척의 배로 나라를 지켜냈다고. 자못 비장하게까지 들린다.

일본 아베정부의 반도체 소재 수출규제 발표 이후 정부여당이 주도해 나가는 분위기다. 21세기, 그러니까 2019년 7월 시점의 대한민국은 마치 임진왜란, 아니면 구한말 일본제국의 한반도 침탈 전야와 방불한 상황이라도 맞은 것 같다.


‘사태가 이 지경에 오기까지 정부 책임도 없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이런 질문을 던지면 ‘지금이 그럴 때냐. 그럴 거면 도쿄에 가서 살아라’ 라는 핀잔이 나온다. 그것도 이성적이고 꽤나 식견이 높다는 좌파 논객의 입에서.

그 정도는 그래도 점잖은 편이다. ‘일본이 잘했다는 건 아니다. 그러나…’ 이런 식의 되돌아봄을 개진하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바로 토착왜구로 낙인을 찍는다.

일본의 수출규제에 대응하는 문재인 정부의 문제점을 비판하는 전문가나 학계 인사, 언론, 야당은 죄다 토착왜구다. 그 뿐이 아니다. 일본적인 것, 그러니까 그것이 음식이든, 문학이든 무엇이든 단순히 일본 것을 조금만 좋아하면 토착왜구가 되는 판이다.

21세기 대한민국의 화두라도 된 것 같은 이 ‘토착왜구’란 말은 어디서 유래됐나. 멀리는 임진왜란 때부터, 가까이는 구한말 시대부터 쓰인 것으로 전문가들은 밝힌다.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가왜(假倭)’가 그것으로 ‘왜구를 가장해 약탈을 일삼던 불한당의 무리’를 말한다. 그 ‘가왜’가 구한말에는 ‘토왜(土倭)’, 혹은 ‘토착왜구’로 불렸다는 거다.

그 말은 세월이 지나면서 점차 잊혀졌다. 그러다가 최근 적폐청산, 거기서 더 나가 친일잔재청산을 모토로 내건 문재인 정부 들어 되살아나 이제는 시대의 버즈워드인 양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토착왜구란 말의 보다 정확한 현대적 의미는 무엇일까. 친절하게도(?) 북한의 대남모략 선전선동기구인 조평통 인터넷 ‘우리민족끼리’는 지난 3월 28일 이렇게 풀어서 정의했다. “한마디로 얼굴은 조선 사람이나 창자는 왜놈인 도깨비 같은 자란 뜻”이라고.


전시 애국심 강요와 함께 만연하고 있는 토착왜구 공격, 그러고 보니 이 현상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 같다. 뭔가 정치프레임 냄새가 짙게 배어 있다고 할까.

툭하면 ‘빨갱이’로 몰아갔다. 과거 독재정권이 전가의 보도인 양 써먹던 프레임이다, 좌파 정권은 그걸 역으로 사용해 걸핏하면 ‘토착왜구’로 낙인찍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죽창가를 드높이 불러대면서.

무엇을 말하나. 내년 4월 총선을 앞두고 이른바 ‘남북 평화프로세스’와 반일 프레임에 정부여당은 ‘올인’ 했다는 것은 아닐까. 이웃나라 일본과의 관계야 무너지든 말든.

그 결과는 뭘까. 극으로 달리는 남남갈등이다. 그걸 제일 좋아할 사람은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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