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마추어가 보는 미국역사 (264)제39대 Jimmy Carter 대통령③

2019-07-15 (월) 조태환/ LI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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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인물을, 대통령까지 지낸 정치인을, 몇줄의 짧은 글로 평가한다는 것이 어려운 일이다. 동일한 인물도 평가하는 “기준”에 따라 상반되는 결론이 나올수 있다. Jimmy Carter 는 환경에 따라 적응할줄 아는 유연한 사람이었으나 원칙까지 타협해 버리는 정치인은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그는 민주당 대통령후보 공천을 얻어내는 과정에서 남부쪽의 지지를 받기위해 인종별 학교분리를 주장했던 Alabama 주의 George Wallace 지사와도 손을 잡았으며 동북부의 민주당 보수계열들의 지지를 받아서 그의 인종차별관에 대해서 의문을 가졌던 사람들도 있었으나 그는 이미 Georgia 주지사 재임중에 흑인들을 판사등 중요공직에 많이 임명하였었으며 대통령 재임시 Atlanta 줄신 흑인 Andrew Young 목사를 주UN 미국대사로 임명하는등 분명한 인종평등관이 있었던 사람이었었다.

Carter 는 친교술이 부족한 Washington 초년생으로써 비서실장에도 대통령 선거참모이었던 30대의 Hamilton Jordan 을 기용했었는데 같은 민주당이 다수당이었던 국회와의 관계가 원활하지 못했던 문제 들도 있었다.


Nixon 대통령의 사직에 까지 이른 중앙정부의 난국을 경험한 미국사람 들은 Carter 의 “Washington 초년생”임을 그의 “강점”으로도 생각하였었다.

Carter 는 맡은 직무에 성실했던 성격이었던 모양으로 Georgia 주상원의원으로 있었을때에 밀려오는 자료들을 다 읽어보기 위하여 “속독법”을 공부하였었다고 한다.
1976년의 대통령선거 민주당후보가 되기위하여 다른 후보들에 앞장서서 5만마일을 뛰어다니며 37개의 주들을 방문하면서 200번의 연설을 하였었다고 한다.

공천 선거초반에 투표자들의 인지도가 2%에 지나지 않았던 그는 모든 사람들의 예상을 뒤엎고 9개월후에 민주당 대통령후보로 공천을 받았었다. 대통령선거 결과 Walter Mondale 상원의원을 부통령후보로 했던 Carter 는 Robert Dole 상원의원을 부통령후보로 하였던 Ford 를 50.1% (4천83만표) 대 48 % (3천915만표) 로 이겨내었는데 선거인단 표수로는297 대 240 이었으나 Carter 는 23개주에서, Ford 는 27개주에서 각각 승리하였었다.

집권당의 교체로 Carter 는 국내정치의 변화에 많이 기여하였고 1980년 1월에 수입자동차들의 경쟁에 밀려 도산을 하게 되어있던 Chrysler 자동차회사에 35억불을 정부 보증융자를 해주어 구출해 내었었다.

Carter 의 대통령재임중에 굵직한 국제문제들이 많이 이러나서 국제정치적인 관점 에서 보면 상당한 “업적”들이 있었다고 생각되는데 미국내 Carter 의 비평자들은 도리어 그가 “실패”를 많이 했다고 보는것 같다.

우리는 미국이 “정의”를 추구하고 평화적인 외교방법을 선호하는 나라이라고 생각하는 수가 많은데 실은 “국익”을 위해서는 무력사용도 주저하지 않았던 나라가 미국이다. 미국의 충동질로 시작된 미서전쟁의 승전결과로 미국의 영토와 영향력이 훨씬 커졌던 역사가 있었고 육지에서는 외교담판을 하고 있는중에 항구에는 큰 군함몇척을 정박시킴으로써 무력을 과시하는 Theodore Roosevelt 대통령의 “Gun Boat Diplomacy” 를 보며 미국사람들은 “거 ‘외교’ 한번 시원하게 잘하네” 라고 환호를 했던것을 생각해보면 요즈음의 Trump 의 “America First!” 라는 구호와 “협박외교”가 과거의 미국역사에 전혀 없었던 일은 아니다. 예나 지금이나 대부분의 미국사람들은 단기적일 지라도 가시적인 결실이 있는 국제외교를 지지한다고 말할수 있을 것이다.

국제정치상 미국의 중대한 맹점중의 하나는 “우방”국가가 철저하게 반공을 하고 절대적으로 친미를 하는한 그나라의 정치, 인권, 사회정의 등의 문제에는 상관하지 않고 집권자를 지지하는 것이다. 정권이 부패하였거나 독재정치를 하더라도 “안보”가 유지되고 “친미”를 하면 미국은 차라리 더 편리하다고 생각하는듯한 인상을 주는 것이다. Shah 의 Iran 에서, Marcos 의 비율빈에서, 박정희의 한국에서, Somoza 의 Nicaragua 에서 우리는 미국의 대외정책이 실행되고 있는것을 보아 왔었다. 그래서 독재폭정에 시달리고 있는 국민들중에는 자국의 폭군들에 대한 분노가 가끔 반미감정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우리는 제2차 세계대전중의 Nazis 의 만행을 보고 Hitler 만 규탄하고 나면 할일은 끝난것으로 착각했던 일이 있다. 그러나 Hitler 뒤에는 “자의 이었던 타의 이었던” 간에 침묵하고 동조했던 대다수의 독일인들이 있었음을 잊어서는 않된다. Hitler 의 제1차적 피해자들인 독일국민들도 똑같이 처벌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아니지만 독재자들의 폭정뒤에 뒷짐지고 서있는 미국이 전혀 무책임한 방관자라고 볼수만은 없는 경우가 많으리라고 생각된다.


Carter 는 “미국의 맹점”을 지워보려고 노력했던 근래의 미국의 드문 대통령이 었으리라고 생각된다. 그가 미국내에서 평가절하를 받도록 만들었던 국제문제 몇가지를 얘기해 보기로 하자.

대통령취임후 Carter 는 “인권” (Human Rights) 존중문제에 대해서 강력하고 분명한 선언을 했다. 과거의 미국대통령들이 “인권유린”은 적대국가들에서나 일어나고 있는것 처럼 말했던것과는 대조적으로 Carter 는 앞으로 미국은 “우방”이 거나 “적대국”이거나를 상관하지않고 어느곳에서나 “인권유린은 용납하지 않을것 이다” 라는 공자님 말씀같은 교훈을 선언하자 이 선언은 전세계를 동시에 혼란에 빠지게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우선 미국의 영향권안에 있는 나라의 독재자들은 “친미”를 하는 동안에는 미국의 눈치를 보아가며 국내에서 어떤 폭정을 해도 되는 것으로 생각되어왔던 “공식”에 문제가 있을것임을 느끼게 되었고 쏘련을 위시로한 미국의 적대국가들에게도 혼동을 주는 일이었다. 한국을 포함하여 독재정치에 시달리고 있던 나라들의 국민들에게는 큰 기대와 격려를 주기도 하였었다.

Carter는 쏘련의 반체제운동가들을 찬양함으로써 쏘련을 격노하게 만들어서 그의 군축제안에 쏘련은 냉담한 반응을 보였었다.

독재정치가 심하였던 Brazil, Argentina, Ethiopia 등의 국가들에는 군사원조를 중단하였다. Brazil 은 오랫동안 지속되어오던 미국과의 동맹관계를 단절하고 계속 군부독재하의 후진국으로 남아있으며 Argentina 는 좌경세력으로 정권이 넘어갔으며 Ethiopia 도 군부주도 공산국가가 되었다.

Carter 의 인권정책 때문에 일어난 사태들은 아니지만 Carter 의 비판자들은 그의 정책이 실패한 예들이라고 지적할수 있었을 것이다.

<조태환/ LI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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