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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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풍 절벽과 낭떠러지 절벽 사이로… 예가 선계런가

2019-06-21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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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rand Canyon ‘Rim to Rim’Traverse (하)

▶ 절벽 중간중간에서 쏟아지는 거대한 폭포수에 눈을 의심

병풍 절벽과 낭떠러지 절벽 사이로… 예가 선계런가

Supai Tunnel.

병풍 절벽과 낭떠러지 절벽 사이로… 예가 선계런가

South Rim, Bright Angel Trail을 내려가는 대원들.


병풍 절벽과 낭떠러지 절벽 사이로… 예가 선계런가

North Kaibab Trail의 모습.


Trail은 Canyon의 Creek을 따라 이어진다. 때로는 Creek을 왼쪽으로 때로는 오른쪽으로 끼면서 비교적 평탄하게 이어져 나간다. 아직은 주위가 온통 어둠에 묻혀 있다. 지금 우리는 하이커들이 흔히 ‘The Box’라 부르는 구간을 지난다. 상자속을 연상시키는 움푹한 지형이라, 낮 기온이 120도 이상으로 치솟는 일이 빈번하여, 보통 10~16시 사이에는 통행을 하지 않도록 적극 권유되는 곳이다. 대략, Phantom Ranch를 조금 지난 곳(약 10.65마일 지점)에서 Ribbon Falls Junction을 조금 못미친 곳(약 14.65마일 지점)의 구간을 일컫는다. 4마일 내외의 거리이다. 그런 점에서는 우리는 지금 아주 안전한 시각에 이 구간을 지나고 있다.

어둠이 서서히 엷어지면서 시야가 확장된다. 사진이 찍힐만큼의 여명이 밀려든다(05:00). 잠깐 사이에 온 세상이 깨어난다.

우리가 지나는 트레일은 푹 패인 골짜기를 따라 나있기에 좌우의 시야가 그리 넓지 않다. 계곡 자체도 아주 반듯한 것이 아니니 앞과 뒤의 시야도 그리 길지는 않다. 좌우로 쭈욱 벌려있는 계곡과 그 너머 위로 솟아있는 가장 안쪽의 지형물을 제한적으로 볼 수 있다. 상부가 평평한 Mesa로 보이는 지형이 있고, 반대로 뾰쪽한 첨탑으로, 또 무슨 거대한 성이나 사원같은 모습으로 보이는 지형들이 있다. 지도에 이름이 표기된 지형물과 내 눈이 지금 보고있는 지형물을 서로 짝지어 감상하기에는 내 안목이 너무 어설프다. 그저 수천만년에 걸쳐 조탁된 다양한 모습의 이런 저런 붉은 경관들을 즐길 뿐이다.

흥미롭게도, 내가 지닌 지도에는 이 Bright Angel Canyon을 중심으로 양 옆에 각각 9개씩의 ‘Temple’이 명명되어 있는데, 그 내용이 참으로 다양하다. 왼쪽에는 ‘Confucius, Zoroaster, Buddha, Osiris, Horus, Manu, Brahma, Deva, Shiva’의 이름을 붙인 Temple들이 있고, 오른쪽에는 ‘Vishnu, Krishna, Sheva, Venus, Juno, Jupiter, Apollo, Irama, Solomon의 이름을 붙인 Temple들이다. 인도, 이집트, 중국, 로마를 비롯 전 세계의 주요 종교들을 망라하여 이름을 부여하였다.


오랜 세월동안 비와 눈에 깎여나가고 남은 지형들의 일부는 거대한 종교적인 사원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하므로 자연스레 Temple이라 칭하게 된 것이리라. 그러나 그렇더라도 여러 종교들에 관련된 이름들이 부여된 배경은 무엇일까? Grand Canyon의 생성이 오로지 신의 섭리에 따르는 대자연의 작용으로 이루어졌다고 보고, 모든 신들에게 공히 감사의 경배를 올린다는 취지에서 비롯된 일이리라 짐작해 본다. 아무튼 어떤 특정한 종교에 편향되지 않고, 여러 종교를 망라하여 명칭이 부여된 것을 보면, Melting Pot으로 표현되는 미국다운, 종교의 자유가 인정되는 미국다운, 그런 발상이라서 반갑다.
청신한 아침햇살이 완연히 사위를 밝게 드러낼 즈음(05:15)에, 47.8마일의 Rim2Rim2Rim을 목표로 하여 갈 길이 요원한 Jason, Tay, Sunny, Susan들이 그만 이 쯤에서 좀 더 바쁜 행보로 우리와 헤어진다(14.2마일).

저들에 비하면 우리 Rim2Rim조는 훨씬 느긋한 마음으로 좌우를 둘러도 보며 한결 여유롭게 걸을 수 있다. 좁다랗게 이어지는 등산로는 오랜 세월에 걸친 사람들의 발걸음으로 다져진 듯 정갈하고, 길 섶에는 땅에 낮게 깔리는 초본식물들이 무성하고 푸르러 마치 여느 산골의 마을길을 걸어가는 듯 평화로운 느낌이다. 키를 넘기는 큰 나무는 거의 없고 기껏해야 관목류가 드문 드문 섞여 있는 그런 잔잔한 정경이다. 물이 흐르는 얕은 개울이 중심에 있어선지 대략 50~100m 내외의 폭이 되는 계곡의 바닥이 한 껏 푸르다. 그러나 눈을 들어 계곡의 양 안 기슭을 바라보면 이는 계곡의 바닥과는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 뭐랄까, 들쑥날쑥 깎이고 매말라 황량한 느낌이다. Bright Angel Creek의 하상이 포근하고 평활한 여성의 자태라고 하면, Bright Angel Canyon의 상층부는 거칠고 투박한 남성의 기상에 걸 맞는다.

멀리 길 왼쪽 앞의 검붉은 계곡 기슭에 폭포 하나가 조그맣게 보인다(05:28; 14.8 마일). 계곡의 붉은 암벽 기슭 너머 뒤에 대리석인양 밝고 큰 바위봉이 우뚝 솟아있는 방향이다. Ribbon Falls이다. 꽤 거리가 있어서인지 어린아이 오줌줄기가 연상된다.

길 안내판이 있는 갈림길이 나온다(05:39). 왼쪽으로 Ribbon Falls에 이르는 짧은 Spur Trail이 뻗어 있다. 그리 멀지 않아 보이지만, 마음이 바빠 주마간산, 그냥 직진한다. 계곡의 기슭을 이루는 검고 붉은 암벽들에 푸른 이끼인듯 얇게 풀들이 나있어, 어찌보면 계곡 전체가 온통 구리로 조성된 이상한 세상이 아닌가 싶다.

자그마한 목조건물이 나타난다(06:16; 16.9마일, 4080’). Ranger Station이란 현판이 있다. Cottonwood Ranger Station & Campground이다. 12개의 Camp Site가 있어 40명을 수용할 수 있다. 큰 나무들이 주변에 자라고 있어 공원같은 분위기이다. 상수도가 있고 피크닉 테이블이 있다. 야영객일 여성 한 분이 물을 받고 있다. 여기에서 아침식사를 해결키로 한다. 일우와 나는 Cottonwood Tree의 가지가 드리워진 바위 위에서 등산용 버너로 라면을 끓여 먹는다. 캠프 안내판을 일별하고, 다시 길을 나선다(06:47).

개울의 폭이 차츰 좁아지고 양 기슭은 차츰 높아진다. 트레일의 고도도 서서히 높아진다. ‘Manzanita’라는 안내판이 있는 쉼터에 도달한다(07:28; 18.3마일; 4600’). 식수가 있고, 벤치가 있다. 예전에는 ‘Pump House’로 불렀다. 반갑게도 몇 분 한국인을 만난다. 중년의 남녀 혼성팀이다. North Rim에서 출발하여 South Rim으로 가는 길이다. ‘무심산악회’ 소속의 덕성스러워 보이는 여성분께서 음식을 많이 주신다. 내 먹을 음식은 충분하지만 그 정을 뿌리치기 어려워 배낭에 받는다. 역시 우리 한인여성들은 손이 크고 먹는 인심이 넉넉함을 다시 한번 실감하며, 길을 떠난다( 07:38 ).

이제까지는 트레일이 Bright Angel Creek & Canyon을 따라 북동쪽으로 이어져 왔는데, 여기서부터는 왼쪽에서 유입되는 Roaring Springs Canyon을 따라 북서쪽으로 방향이 바뀐다. 또 여지껏은 Colorado 강을 건넌 뒤로 거의 10마일 가까이 비교적 반듯하게 이어지는, 좔좔좔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하상주위를 걷는, 그런 길이었지만, 이제는 계곡의 왼쪽 기슭을 따라 지그재그로 굽고 펴지며 고도를 부지런히 높여 나가는 길이다. 본격적인 North Rim 오름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제 개울은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 않을 만큼 낮다. 우리가 그만큼 높아진 것이다. 갈수록 길이 험하고, 경관은 웅장하다. 왼쪽은 위로 아득한 절벽이며, 오른쪽은 아래로 아찔한 절벽이다. Creek을 따라 하상을 걷던 내가 ‘속인(俗人)’이었다면, Cliff을 따라 하늘길을 가는 지금의 나는 ‘우화등선(羽化登仙)’한 신선이 아니고 무엇이랴 싶다. 그래선가 몸은 천근으로 무겁지만, 마음은 깃털처럼 가뿐하다.

눈 앞 바로 건너 편의 거대한 암봉의 바위절벽 속에서 만만치 않은 양의 폭포수가 쏟아져 내린다(08:22). 암벽 중간에서 쏟아져 나오는 물줄기라니, 피로에 의한 착시인지 아닌지 올라가 확인하고 싶어진다. 여기가 더는 인간계가 아닌 하늘나라 선계라서 일어나는 이적인가! 필설로 다할 수 없는 대자연의 비경에 놀라며, 또 위험을 무릅쓰고 사람이 어렵게 깎아낸 것으로 보이는 위태로운 길에 놀란다. 굽이를 돌아설 때마다 거대한 성을 연상시키는 암봉들이 연이어 나타난다.

암벽속으로 구멍이 뚫려 있는 터널이 나타난다. Supai Tunnel이다(10:00; 22.0마일; 6800’). 30m내외의 터널을 지나니, 왼쪽에 화장실인 듯한 작은 목조건물이 있고, 상수도 시설이 있다. 노새행렬을 마주치면 트레일의 안쪽으로 비껴서서 기다리되, 몰이꾼의 지시에 따라달라는 안내판이 있다. 거동이 자유롭지 않은 사람들이 노새(Mule)를 타고 North Rim에서 이 Supai Tunnel까지 관광에 나서는 일을 염두에 둔 당부이겠다.

이곳을 지나니, 이제는 길게 병풍을 두른 듯한 암벽이 눈 앞에 펼쳐진다. 길 옆에 이곳의 지질의 구조를 설명하는 그림판이 있다. Grand Canyon은 원생대, 고생대의 지층이 5,000’~10,000’ 정도가 융기되어 솟아오른 Colorado Plateau에 형성된 계곡이다. 고도가 높은 고원이 되면서, 비와 눈이 많이 내리는데, 특히 북쪽이 남쪽보다 1,000’ 정도가 더 높고보니, 북쪽의 강우량이 더 많고, 북에서 남으로 흘러내리는 수량도 더 많다. 그래서 북쪽은 지류가 많이 생기고, 남쪽에 치우쳐 Colorado River가 형성된다. 물이 많이 흐르니, 그에 따라 침식작용도 활발하여 융기된 지층들이 깎여나가 20억년전의 아래 지층도 드러난다. 시대별 지층의 전시장인 셈으로, 맨 위의 지층은 10~300만년 전의 화산활동에 의해 형성된 지층이다. 최근의 탐사에 의하면 Colorado강 유역은 7,000만년에 걸쳐 조성되었는데, 120만년 전에 이미 거의 현재의 깊이로 깎여졌고, 지금도 이러한 침식은 진행된다.

‘COCONINO OVERLOOK’이란 팻말이 있다(11:10; 23.3마일). 뒤로 돌아보는 깊은 계곡과 Mesa같은 고원의 경치가 장관이다. 불과 0.6마일 거리인 North Rim쪽에서 가볍게 산책을 나온 것으로 보이는 젊은 남녀가 천연반석 전망처에서 다정한 포즈로 사진을 찍는다. 빼어난 대자연의 풍광에 청춘연인의 풋풋함이 더해지니, 금상첨화란 바로 이를 일러 말함이다.

이제 거의 다 왔다는 사실을 반추하면서 마지막 힘을 짜낸다. 마침내 저 앞으로 트레일의 종점인 듯한 정경이 보인다. North Kaibab Trailhead임을 알리는 안내판에 다다른다(11:49; 23.8마일, 8250’). 다들 이제 해냈다는 기쁨을 서로 나눈다. 13시간 45분에 걸친 Rim to Rim 산행을 기념하여 다함께 활짝 웃는 모습으로 사진을 찍는다.

North Rim의 Backcountry Office에서 앞서 나갔던 팀원들을 만난다. ‘The Box’구역이 이미 120도를 넘는 기온이라 위험하다며 산행을 말리는 Ranger의 조언에 따라 왕복산행을 접었다는 사연이다. 그들은 14시에 출발하는 셔틀버스($90)를 타고, 우리는 Ignacia의 여동생이 가져온 차를 타고, 각기 4시간만에 South Rim 에 도착한다.

LA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문득 의문이 생긴다. 왜 나는, 또 우리는 이런 류의 힘든 산행을 스스로 선택하고 기꺼이 이를 감내하는 걸까? “There’s physical, mental and moral strength, to be found on a mountain peak.” - Sierra Club을 거쳐간 Will Thrall(1873~1963)님의 어록으로 자문자답을 마무리 하면서, 핸들을 잡은 일우의 양해 아래, 금새 깊은 잠에 빠져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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