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형으로 태어난 죄’

2019-06-14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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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해군은 광해군의 친형이다. 공빈 김씨 소생으로 서자지만 선조의 장자로 선조에게 적자가 없고 김씨가 선조의 총애를 받았음을 감안하면 세자로 책봉될 수 있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세조는 그를 제쳐두고 그의 동생 광해를 세자로 삼았다. 말년에 적자 영창대군이 태어나면서 광해의 지위도 흔들렸지만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군사를 이끌고 왜군을 무찌르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고 따르는 신하가 많아 제거하지 못했다.

어째서 임해가 동생 광해에게 밀렸는지에 대해서는 원래 성질이 포악하고 덕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그가 근왕병 모집을 위해 함경도에 갔을 때 그의 오만방자한 태도에 분노한 백성들이 그를 잡아 왜군에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왜란이 끝난 후에도 공금 횡령에 양민 학대 등 악행을 저지른 데다 병사를 모아 반란을 꾀했다는 상소가 올라온 것을 보면 광해로서는 친형이 두고두고 골칫거리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에 대한 평가는 당시 칼자루를 쥐고 있던 광해 지지 세력이 내린 것으로 악행이 과장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결국 그는 교동으로 유배됐다 살해되는데 그를 지키고 있던 병사들은 처음 그가 병사했다고 보고했으나 훗날 그의 노비는 그가 목이 졸려 살해됐다는 증언을 내놨다.

광해군 시대를 다룬 한 사극에서 임해는 자기가 곧 죽을 것을 직감하고 “나는 왕이 될 생각이 없는데 왜 나를 죽이려 하는지 모르겠다”고 한탄하는 장면과 이 말을 들은 한 신하가 “임해는 형으로 태어나고도 왕이 되지 못한 죄로 죽어야 한다”는 대목이 나온다.

김정일의 장남으로 태어났지만 그의 눈 밖에 나 권좌에서 밀려난 채 해외에서 떠돌다 2017년 2월 말레이시아에서 살해된 김정남이 미 CIA의 정보원이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워싱턴포스트 베이징 지국장이자 한반도 문제 전문가인 애나 파이필드는 그의 저서 ‘마지막 계승자’라는 책에서 김정남이 미국 정보기관에 북한 정치권에 대한 정보와 북한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에 대한 해석을 전해왔다고 주장했다. 다른 정보 관계자들도 이를 인정하고 있으며 일부에서는 한국 정보부까지도 접촉했다는 주장을 내놓고 있다.

김정남이 이들 정보 당국자와 만난 것은 2013년 그의 뒷배를 봐주던 장성택이 처형되면서 경제적으로 곤궁해진 것이 직접적 원인으로 풀이되고 있다. 그가 살해되기 얼마 전 말레이시아에서 미국 정보당국자를 만났으며 그가 사망했을 당시 그의 가방에서 현금 12만 달러가 나왔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이 사실을 안 김정은이 이를 배신행위로 보고 살해를 명령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이런 일을 하지 않았더라도 제 명에 죽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광해는 친형을 죽이라는 빗발치는 상소에도 그를 죽이는 것을 꺼렸다. 적자인 영창대군을 죽일 때도 마찬가지였다. 사극에서는 간신들이 그가 모르는 사이 이 둘을 제거하는 것으로 나온다. 그는 이에 분노하지만 그렇다고 일을 저지른 사람을 벌하지도 않는다. 친형과 적자를 살려두면 자신에게 두고두고 위협이 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세조가 단종을 죽인 것이나, 이방원이 이복형제들을 죽인 것도 같은 이유다. 왕조체제에서 장차 자신의 권력과 생명까지도 위협할 경쟁자를 그대로 놔둘 수는 없었을 것이다. 김정남이 죽은 것은 ‘형으로 태어나고도 왕이 되지 못한 죄’에 대한 벌이라고 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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