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위기의 ‘선한 사마리아인’들

2019-05-31 (금) 권정희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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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길에 프리웨이를 나와 로컬도로로 진입하는 교차로에 서니 길모퉁이에 천막이 하나 생겼다. 얼기설기 가린 천막 안에서 한 노숙자가 잠을 자고 있다. 하루 종일 길거리를 헤매느라 고단했을 몸, 누이기만 해도 꿀잠이 밀려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잘해야 며칠. 천막은 다시 철거되고, 모아놓은 잡동사니/살림살이들은 청소될 것이다. 모퉁이에서 구걸하는 노숙자들의 얼굴도 수시로 바뀐다.

그런 광경이 일상이 된지 수년, 팻말을 들고 선 지친 모습들에 면역이 생겼다. 우리 안의 ‘선한 사마리아인’은 의식의 저편 어디론가 사라지고 무덤덤한 무관심이 들어섰다.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가져야할 기본적 동정심이 마비되고 있다. 마비되라고 강요하는 사회이다.


애리조나 서부에 아호(Ajo)라는 국경마을이 있다. 멕시코 접경으로부터 아호에 이르는 40마일은 거친 사막이다. 한번 발 들여놓으면 생명이 위태로운 그곳에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를 않고 있다. 중남미로부터 밀입국하는 불법이주자들이다.

아메리칸 드림을 쫓았던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서 개죽음을 당했다. 지난 2000년 이후 발견된 유골만 3,000구가 넘는다. 사막 어딘 가에서 매순간 누군가가 죽음에 직면해 있다는 사실을 지역주민들은 안다. 이를 묵과할 수 없던 사람들이 만든 것이 ‘죽음은 그만(No More Deaths)‘이라는 자원봉사단체이다. 회원들은 밀입국자들의 탈수증과 굶주림에 대비해 물과 먹을 것을 사막 요소요소에 배치해 둔다. 조건 없는 선행, 선한 사마리아인의 행동이다.

신약시대 사마리아인은 유대인과 상극이었다. 그런데 유대인이 강도를 만나 죽어갈 때 유대인의 지도자인 제사장도 레위인도 피했지만 사마리아인이 그를 돌봐 주었다면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할 이웃은 바로 사마리아인이라고 예수는 가르쳤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이다.

29일 애리조나, 투산에서 한 ‘선한 사마리아인’이 연방법정에 섰다. ‘죽음은 그만’ 자원봉사자로 활동하는 스캇 워렌(36)이다. 박사학위 논문주제가 ‘이주’였던 그는 2014년부터 아호에 살며 사막의 이주민 구호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그가 국경수비대에 체포된 것은 지난해 1월이었다. 중미출신 남성 2명을 도와준 것이 문제가 되었다. 사막에서 이틀을 걸었다는 그들에게 청년은 마실 물과 음식을 주었으며, 발이 물집 투성이인 것을 보고 자원봉사자들이 쉬는 휴식처에 잠시 머물게 해주었다.

국경수비대 측은 그가 의도적으로 밀입국자들을 숨겨주었다고 말한다. 외국인 밀입국 알선 및 은닉죄라는 주장이다. 유죄로 확정될 경우 그는 최고 20년형을 선고받는다. 반면 스캇의 변호인은 그가 단순히 어려운 사람들을 도왔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는 법을 준수하며 생명을 살리는 선한 사마리아인”이라고 맞선다.

“사막에서 개죽음 당해 마땅한 사람은 없다. 이런 죽음을 방지하려 했다고 형을 살아 마땅한 사람은 없다.” - 스캇의 부모는 아들에 대한 공소취하 청원운동을 펼쳐 근 13만명의 서명을 받았다. 법정 안은 스캇의 선행을 지지하는 방청객들로 가득하다.


물에 빠진 사람을 보면 저도 모르게 달려가 구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라고 맹자는 말했다. 인간으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측은지심이다. 이런 마음조차 일지 않는다면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 맹자의 성선설의 기초이다. 기독교 전통으로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심성이다.

조건을 따지지 않고 돕는 선행이 처벌대상이 되고 있다. ‘죽음은 그만’ 봉사자들 중 스캇을 제외하고도 8명이 2017년 구호활동 관련 경범죄로 기소되었다. 아호에서 자동차로 9시간 반 떨어진 서부 텍사스에서도 유사 사건이 있었다.

마파라는 소도시의 시 검사장이자 4번이나 시장을 역임한 테레사 토드(53)는 지난 2월 어느날 밤 프리웨이를 운전 중 도로변에서 필사적으로 손을 흔드는 3명의 중미 사람들을 보고 차를 세웠다. 겁이 나기도 했지만 그중 한명이 막내아들 또래인 게 마음을 움직였다. 모성애가 발동한 것이다. 20살 전후의 그들은 엘살바도르 태생 삼남매였다. 모두 탈수와 굶주림으로 지쳐있었고, 한명은 병색이 완연했다. 일단 몸을 녹이도록 이들을 차에 태운 후 토드는 친지들에게 조언을 구하는 문자들을 보냈다.

그러는 사이 국경수비대 요원들이 들이닥쳐 그를 연행했다. 3시간 조사를 받았고 셀폰을 압수당한 그의 혐의는 밀입국 알선. “곤궁에 처한 사람을 도운 게 죄라니 나는 도대체 어느 나라에 있는 건가” 토드는 말한다.

“아호에서는 사막을 가로질러 오는 사람들에게 물과 음식을 제공한 지 수십년이다. 누군가 문을 두드리고 목마르다고 하면 물을 준다. 이민서류를 먼저 보자고 하지는 않는다. 이런 걸 정부가 범죄행위로 만들어서는 안된다.” 스캇의 말이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기독교 전통의 나라 미국이 너무 각박해지고 있다. 우리의 무관심도 분명 한몫을 할 것이다. 우리 안의 ‘선한 사마리아인’을 살려낸다면 그래서 따뜻한 관심을 회복한다면 미국의 정책방향에 좀 더 책임감 있는 목소리를 내게 되지 않을까.

<권정희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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