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다빈치 500주기를 맞아

2019-05-18 (토) 민병임 뉴욕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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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2일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500주기였다. 신이 내린 천재 예술가이자 과학자인지라 감히 다루기가 어려워 망설이다가 5월이 가기 전에 꼭 한번 다빈치의 ‘호기심’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1452년 4월15일 태어나 프랑스 프랑소아 1세의 초청으로 앙부아즈에서 3년간 머물다가 1519년 5월2일 67세로 사망했다.

다빈치가 남긴 대표작으로 ‘모나리자’, ‘최후의 만찬’, ‘비트루비우스적 인간’ 세 작품을 들 수 있다.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모나리자’는 1962년 미국과 프랑스의 정치적 갈등을 문화의 힘으로 풀고자 뉴욕과 워싱턴 D.C.로 나들이한 적이 있다.


워싱턴 D.C.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에서 전시를 할 때 당시 존 F. 케네디 대통령 부부가 이 그림을 앞에 놓고 기념사진을 찍었으며 뉴욕 메트 뮤지엄에 전시할 때는 전시기간동안 총 170만명이 관람했다. 오로지 ‘모나리자’ 한 점만 놓고 하는 전시회에 사람들은 몇 시간을 기다려 불과 20초를 보려고 밤낮으로 줄을 서니 야간개장도 해야 했다.

현재 방탄 유리창에 갇힌 가로 53cm, 세로 77cm의 ‘모나리자’는 별로 크지 않다. 그에 비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은 이탈리아 밀라노의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아 교회 내 수도원 식당 한 벽면을 차지한다.

일본영화 ‘냉정과 열정’에서 10년전 헤어진 남자친구 준세이의 편지를 읽는 아오이의 등 뒤로 원형과 직사각형 창이 있는 아름다운 이 성당의 모습이 보인다.

다빈치가 1494년부터 1497년 제작한 이 작품은 880x460cm로 회벽에 유채와 템페라로 그려졌고 1977년부터 22년간 복원작업을 거친 다음 공개 중이다.

복원된 그림은 예수의 등 뒤 창가의 파란 빛과 열두제자 얼굴들이 밝고 선명하여 원화와 많이 틀리든 비슷하든 500년 전 다빈치가 한 구도, 공간 처리, 인물 배치 즉 그림의 골격은 그대로 남아있을 것이고, 복원화의 대가들이 복원했을 터이니 그림은 다빈치가 그렸다고 믿어도 된다.

전자장치가 작동하는 유리문을 들어서면 오른쪽 한 벽면 전체에 그려진 이 그림은 말 그대로 벽화인지라 밖으로 나갈 수가 없다. 오로지 밀라노에 가야만 이 ‘최후의 만찬’을 볼 수 있다. 성당은 세계2차 대전의 피해를 입었지만 신기하게도 이 그림만은 무사하게 보존되었다.

예수가 체포되기 전날 밤 제자들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는 모습을 그린 이 그림은 한 그룹 20명으로 정해 단 15분만 볼 수 있다. 드디어 긴 줄을 지나 문이 열리고 눈앞 가득 ‘최후의 만찬’이 나타나면 기독교신자이든 비신자든 신비하고 오묘하고 깊숙한 비밀의 문에 다다른 듯, 르네상스 시대 문화의 정점을 본 듯 가슴이 뭉클해지며 다리에 힘이 풀려버린다.


다빈치가 남긴 수천 개의 스케치, 1만4,000여장의 노트에는 과학자, 해부학자, 발명가, 도시계획가, 천문학자, 음악가인 그의 자취를 볼 수 있다. 어린 시절 온 동네의 벽과 바닥에 그림을 그리고 다녔다는 다빈치는 고등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사물을 관찰하는 호기심이 끝이 없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왜’ 라는 질문으로 일생을 보냈고 질문과 관찰 결과를 기록했다. 다빈치는 세계에서 가장 호기심이 많았던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사용하지 않은 천은 녹슬고 흐르지 않는 물은 한겨울에 얼어붙는 것처럼 재능도 사용하지 않으면 때를 잃고 빛이 바랜다”, “가장 고귀한 즐거움은 이해의 기쁨이다” 등등 그의 말들은 평생 자신의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 노력한 모습을 보여준다.

뉴욕에서는 다빈치 500주기를 맞아 경매기업 소더비가 영국 채트워스 하우스 소장 다빈치의 작품 ‘레다와 백조’를 6월28일부터 9월18일까지 전시한다고 한다.

호기심 많고 창조적인 인간, 교회의 통제를 거부하고 자신의 소신에 따라 그림을 그린 다빈치, 그는 게으르고 나태하며 타성에 젖은 우리들을 사후 500년에도 일깨우고 가르친다.

<민병임 뉴욕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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