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3.2마일의 미궁… 이자리에 다시 설 수 있을까

2019-05-17 (금) 정진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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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win Peaks (East ) & Triplet Rocks (상)

▶ 남가주서 가장 어렵다는‘악’소리 절로 나는 코스… 40~60대 네 멤버는 어둠을 뚫고 무모한(?) 도전에 나섰다

3.2마일의 미궁… 이자리에 다시 설 수 있을까

Twin Peaks ( East ) 정상.

3.2마일의 미궁… 이자리에 다시 설 수 있을까

등산로의 어느 비탈 구간.


신화속의 영웅 Theseus가 인신우두의 식인괴물 Minotaur를 처치키 위해, 한번 들어간 자는 결코 나올 수 없다는 미궁(Labyrinth)을 찾아 들어간다는 경지가 이런 것이었을까? 아니면, Hera여신의 저주에 따라 필사의 고난을 감연히 치루어 냈다는 Hercules의 모험에 감히 비유할 수 있으려나?

미노타우로스를 제거하고 아리아드네의 실타래 아이디어로 미궁을 잘 빠져나온 테세우스의 활약처럼, 우리는 바위결을 잘 읽어내는 써니와 제이슨의 탁월한 혜안과 기량, 불굴의 용력을 지닌 로저, 또 GPS라는 21세기의 실타래가 있어, ‘Triplet Rocks’의 형체를 카메라에 가두어 담고, 3.2마일에 걸친 지난한 암벽, 벼랑, Gully, Chaparral Bush의 미로를 기까스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작년(2018) 11월 11일, 벼르고 벼르던 San Antonio Ridge Traverse 산행을 힘들게 잘 마치고 LA한인타운에서 늦은 저녁을 먹는 자리였다. 산행을 무사히 마친 우리를 축하해주기 위해 동석한 Y선배가 불쑥 한마디 말을 건넨다. “자, 그럼 이젠 Triplet Rocks를 한번 해보지 그래!” 사실 나는 이를 그저 그러러니 하며 지나가는 말로 가볍게 들었는데, 의외로 제이슨이 바짝 관심을 보이고 나선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열정의 젊은 산꾼 제이슨이 마침내 날을 받아 산행을 제안해 왔으니, 결국 Y선배의 그 한마디는 흥부네 집에 떨어뜨린 강남제비의 ‘박’씨가 되어, 일요일( 5월5일)의 ‘Triplet Rocks산행’이란 열매를 맺기에 이른다.


San Gabriel 산맥에서는 물론이고 아마도 남가주에서도 가장 어렵다는 평가를 받는 이 두려운 등산 제의를, 제이슨의 열정에 끌려 우려 반 기대 반의 심정으로 수락한다. 이런 저런 이유로 이 산행에 동참키로 한 멤버는 제이슨, 써니, 로저 그리고 나, 이렇게 넷으로 압축된다. 이들은 모두 시에라클럽의 리더이고 멤버이면서 나보다는 거의 스무살 가까이 젊은 산꾼들이다. 발군의 기량을 갖춘 후배들이어서, 이들과의 동행이 든든하긴 하지만, 매우 어렵다고 알려진 이 구간에 우리 모두가 초행이면서, 이 루트에 대한 정보가 미흡하다는 점, 이미 60대 후반이 된 내 나이 등을 생각하니 아무래도 걱정이 된다. 어쨌거나 날짜는 또박또박 잘도 다가온다.

반드시 헬멧과 5리터 이상의 물을 지참하라는 제이슨의 권유를 감안하여 배낭을 꾸려두고, 토요일 밤 10시경에 잠을 청한다. 그들과 우리집 앞에서 새벽 2시에 만나기로 하여 나는 1시에 일어나 이런 저런 마지막 점검을 한다. 마침 2번 도로(Angeles Crest Highway)가 Red Box에서 봉쇄되어 있는 상황이라, Big Tujunga Road로 우회하여 Buckhorn Day Use Area에 도착한 것은 03:40 무렵이다.

사실 나는 며칠전에 이 도로가 봉쇄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내심 반가운 마음으로 이를 제이슨에게 알렸는데, 이리 저리 우회하면 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산행의 취소를 잔뜩 기대하고 있던 나를 여지없이 실망시킨 얄미운 후배들이다.

평소 등산 중에 물을 많이 마시지 않는 편인 나는 물 3리터와 게토레이 2병(1.2리터)을 준비했고, 혹시 몰라 약식 크렘폰과 트레킹 폴 1개를 넣으니 배낭이 꽤 무겁다. 헤드램프를 밝혀 03:51의 까만 어둠을 밀쳐내며 산행을 시작한다. 깊은 고산의 새벽공기는 몸이 덜덜 떨리고 손이 곱아질 만큼 차가운데, 부지런히 걷다보니, 이제 오히려 그지 없이 청량하고 상쾌하다. GPS가 5.15마일을 가리키는 Twin Peaks (East) 정상(7761’)에 오른 시각은 동이 트고도 한 참이 지난 06:38이다.

이곳에 오는 사이에 제이슨이 Sierra Club의 Trip Archives에서 읽었다는 Erik Siering의 글에 대해 언급한다. 1994년에 Asher Waxman, Bob과 함께 이 코스로 산행을 했는데, 07:00에 Buckhorn을 출발하여 09:00에 Twin Peaks정상에 올랐는 바, 이보다 늦는 경우에는 산행을 계속하면 안된다는 언급이 있단다. 그들에 비하면 우리의 산행속도는 크게 느린 셈인데, 그래도 우리가 최초의 출발시각이 빨랐다는 잇점이 있기에, 그분의 견해에 대해 두가지 해석을 해본다. 하나는 Twin Peaks까지 2시간 이내에 오르지 못하는 속도라면 Triplet Rocks로의 산행자격에 미달한다는 뜻일 수 있겠고, 다른 하나는 09:00 이후의 시각에 Twin Peaks에 오르게 됐다면 너무 늦은 시각이 되니 산행을 해선 안된다는 의미일 수 있겠다. 우리들 모두는 “두가지 모두의 의미가 담겨있을 것” 이라는데 의견이 일치된다. 우리는 2시간 47분이 걸렸으니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큰 차이가 난다. 그러나 09:00에 이곳에 오른 그분들에 비하면 우리는 06:38에 정상을 밟았으니, 2시간 22분 더 이른 진행인 셈이다.

좀 마음에 걸리지만, 정상사진을 서둘러 찍고, 동남쪽으로 흘러내리는 줄기를 따라 Triplet Rocks쪽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이미 8번을 올랐던 Twin Peaks이지만 여태껏 정상에만 머물다가 하산했지 이 동남쪽 줄기를 따라 내려가 본 일은 없다. 반갑게도 Ducks가 하나 놓여있는 지점을 따라 잠시 내려가니, 갑자기 눈 아래로 동남쪽 줄기가 한 눈에 쫙 들어온다. 순간 나는 ‘억’하는 소리를 토해낸다. 지그재그로 뻗어내리는 산줄기의 험준한 모습과 그 수려한 자태에 비명인지 찬탄인지를 토해내는 것은 비단 나 혼자만은 아니다. 우리 모두 놀란 탄성을 발하며 일순간 돌이 된듯 일체의 움직임도 없이 다들 멍한 모습이다. 쳐다보면 즉시 돌이 되어진다는 예쁜 요녀 Medusa의 얼굴이 바로 저것이다.

저만큼 아래로 정상에 바위 3개가 아주 조그맣게 보이는 ‘Triplet Rocks’ - 거리는 2~3마일쯤으로 그리 멀지 않아 보이는데, 뻗어있는 산줄기가 마치 예리한 창칼로 잔뜩 무장한 것처럼 보이고 또 몇 개의 연봉들이 아주 뾰쪽뾰쪽한 형세로 솟아 있는 것이다. 단지 한가하게 구경만 하는 입장이라면 너무나 현란하고 멋진 기관(奇觀)이겠으나, 저 곳을 한 걸음 한 걸음 빠짐없이 지나가야 된다는 관점에서는 겁이 더럭 나는 무서운 형세이다. 아름답지만 공포스런 존재이다. 그야말로 ‘혼비백산 기절초풍’의 심정인지 다들 말이 없다. 저런 험악한 지형인줄 알았더라면 ‘언감생심, 아예 맘을 먹지않았을 텐데’라는 당혹감에 빠져든다.


얼마간 진퇴양난의 갈등순간을 지나면서 일행들에게 다짐하는 한 마디 말로 무거운 침묵을 깨뜨린다. “응달진 곳에 혹 얼음이나 눈이 있거나, 정녕 위태로운 구간이 나오면, 산행을 즉시 중단하고 돌아서자!” 그제서야 각자 한마디씩을 토로한다. “야, 저렇게 험한 모습일 줄은 짐작도 상상도 못해 봤다.” “놀랍고도 심란하다.” “이런 것인 줄 알았으면 결코 여기에 오지 않았을 건데!”

그러나 기왕에 새벽 1시 무렵에는 잠에서 깨어 행장을 꾸려 여기까지 왔으니, 여기서 그냥 돌아설 수는 없다는 것이 우리들 모두에게 잠재된 심정일 터이고, 아마 이렇게 산행중단 조건을 전제로 산행지지의 말을 던진 내 내면에는 그러한 눈, 얼음, 위태로운 구간이 차라리 쉬 나타나 주길 바라고 있었을 것이다. 이런 지형인 줄 알았더라면 결코 이 산행을 꿈꾸지 않았을 것이라는 소회를 모두 이구동성으로 공감한다.

어쨌거나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미안하여서라도 산행을 포기하자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하고 마침내 한 걸음씩 발을 떼어 놓기 시작한다. 결연한 표정의 제이슨이 이젠 분연히 앞장을 선다. 예상치 못한 사나운 기세의 산줄기로 초장에 기선을 제압당한, 결코 승패를 알 수 없는, 이 우리의 모험에 용기와 지혜를 겸비한 선봉장으로서의 그의 행보가 크게 위안이 되지만, 그래도 막상 아래로 내려가려니, 도살장으로 들어가는 소의 심사가 이런 것인가 싶다. 감미로운 바다의 요정 Siren의 노랫소리에 홀려서 점점 섬에 다가가다가 결국 해안절벽에 난파되어 죽는다는 선원들의 비극적인 전설이 이런 경우인가 싶다. “그래, 이제 살만큼 살았는데 뭐가 문제인가!”는 자포자기의 자위도 해 본다.

제이슨이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를 진작시키려는 뜻에선지, 돌연 큰 소리로 외친다. “그래 오늘 우리 Triplet Rocks를 한번 잡아 봅시다!” 나는 그 말이 다소 외람되이 느껴져 그 뒤를 이어 한마디를 보탠다. “천지신명이어, 황천후토여, 보호하소서!” 십수년에 걸쳐 산행을 하는 동안 이런 고축의 말을 했던 일은 아마도 이 번이 두번째가 아닐까 싶은데, 지난 해 San Antonio Ridge Traverse 산행에서가 그 첫번째 였을 것이다.

내려가는 코스이지만 이렇다 할 Use Trail도 안 보인다. 그러나 가끔 만나는 Ducks들이, 누군가가 먼저 이곳을 다녀갔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확인해 주기에, 또 애써 여기저기에 돌들을 쌓아놓은 그들이 뒷날에 올 우리들의 안전을 배려해 주고 있다는 사실에서, 실제적인 도움은 물론 심리적으로도 크게 위안이 된다.

우리들의 산행대오는, 사정에 따라 많이 바뀌긴 했으나, 그래도 대체로는 제이슨이 앞장을 서서 부지런히 전후좌우의 사정을 살피며, 또 Down 받아온 누군가의 GPS Track을 살피며 나아가고, 써니는 맨 뒤에 서서 나와 로저의 안전한 전진을 돕는 Sweeper 역할을 수행하는 형식이다.

20’ 정도 높이의 절벽 위에 도달한다. 직접 이 절벽을 내려갈 방도가 없다. 좌우로 우회루트를 살펴보지만 방도가 안 보인다. 뒤에 있던 써니가 직벽을 내려다 보며 말한다. “이곳으로 내려가면 되겠어요.” 나는 즉시 “어떻게 여길 내려가? 안돼!”라고 핀잔을 준다. 그러나 써니는 선뜻 절벽쪽으로 다가간다. 바라보는 내가 조바심이 난다. 저 아래도 단단한 바위바닥이니 추락하면 치명상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써니는 차분히 바위절벽면을 손으로 더듬어 잡으며 옆으로 한 발 한 발 비스듬히 내려가서 종국엔 거뜬히 바닥에 내려선다. 용기를 내어 나도 동일한 요령으로 절벽에 붙는다. 아래를 보지 말란다. 별일없이 바닥에 내려선다. 써니를 보기가 다소 민망하다. 후생가외란 말을 떠올리면서, 거듭 우리 일행의 잠재된 능력을 체감한다.

개략적인 시각으로 11:15 무렵에, 능선의 정면에 큰 바위덩이들이 솟아 올라있고 그 너머는 300’는 되어 보이는 급사면의 미끄러운 바위절벽이다. 왼쪽도 엄청난 벼랑이라 발 디딜데라곤 한 치도 없다. 오로지 오른쪽의 경사각이 60도는 되어 보이는 Gully인데, 아래로 얼마나 깊게 내려가게 되는지 위에서는 전혀 볼 수 없다. 중간 중간에 잡목이 한 두 그루씩 나있어 시야가 차단되기 때문이다. 제이슨이 우리를 그 자리에서 기다리도록 하고 먼저 깊은 Gully를 조금씩 내려가기 시작한다. 걸핏하면 흙과 돌이 밀려 내린다. 10’ 내외를 내려가면 그 때 마다 발을 딛을데나 손 잡을 데가 마땅치 않아 일단 정지한 자세에서 다음 단계로의 안전한 진행방법을 모색하는 양상이다. 한번 미끌어지면 감당키 어려울 만큼의 급경사이다. 30~50’를 내려간 뒤, 본인이 낙석을 피할 수 있을 만한 각도로 비껴서서 한번에 한 사람씩만 내려 오도록 당부한다. 이런 방식으로 4차례쯤에 걸친 구간별 하강으로 긴 Gully를 통해 경사가 완만한 아래쪽에 내려 선다. 뒤를 올려다 보니, 여차하면 무너져 내릴듯한 까마득히 높은 큰 바위덩이들이 위태롭기 짝이 없다.

이곳에서 다시 이어지는 능선에 오르려면 두텁게 방어막을 치고있는 Manzanita 등의 잡목 숲을 헤쳐 올라야 한다. 두 팔과 두 다리를 총동원하여 이 숲을 헤쳐 나가는 것이다. 때로는 헬멧을 쓴 머리를 먼저 관목더미 속에 들이박고 구멍을 뚫듯이 밀치고 들어간다. 여기 저기 온 몸이 가지에 긁히고 찔리나, 이에 개의할 여유는 없다. 다행히 머리는 괜찮다. 이따금 굵은 나무등걸이나 바위모서리에 머리가 ‘쿵’ 소리가 나게 부딪히기도 하지만 그래도 머리는 안전하게 보호된다. 헬멧의 필수적 필요성이 이렇듯 거친 Bush속에서 좌충우돌하는 과정을 통해서도 학습된다. 이 긴Gully를 통해 아래로 우회했다가 능선에 다시 올라설 때까지는 50여분이 걸린다. 돌아올 때는 이 구간에서 1시간 이상이 소요된다. <5월24일자에 계속>

정진옥 310-259-6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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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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