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충성 경쟁

2019-05-15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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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 대원군 이하응은 고종의 아버지다. 젊은 시절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칼날이 두려워 시정의 무뢰한들과 어울려 일부러 파락호 생활을 했다. 또 안동 김씨 가문을 찾아다니며 구걸도 서슴지 않아 비웃음을 사기도 했던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다.

그가 파락호 생활을 끝내고 왕의 아버지 대원군으로서 권력의 정점에 섰을 때다. 한 고관대작의 집 잔치에 대원군은 VVIP로 초대를 받았다. 명색이 양반들의 연회다. 그러니 시 한 수가 없을 수 없다. 온 좌중은 대원군이 먼저 한 수 짓기를 청했다.

대원군이 막 입을 떼려고 할 때다. 마당 한구석에 앉아 있던 한 젊은 서생이 벌떡 일어나 큰 소리로 “이백, 두보도 울고 갈 구절입니다”라고 극찬을 했다.


이제는 주변으로부터의 아부에 어지간히 익숙해졌다. 그런 대원군이지만 이건 너무하다 싶어 한 마디 나무랐다. “읊기도 전에 명시라니.”

젊은 서생은 그러자 서슴없이 말했다. “대원위 대감께서 시를 읊으시면 정승들부터 만좌한 대감, 영감들이 다투어 칭찬을 할 것이니 언제 소생 같은 사람의 소리가 들리겠습니까. 그래서 알아 주십사하고 미리 한 마디 올려드린 것뿐입니다.”

신문의 날이 지난 지 한참 됐다. 언론주간도 아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새삼 ‘신문’에 대한 정의가 다시 내려진다. 그리고 기자의 자질에 대한 논란도 그치지 않는다.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2년을 맞아 KBS 송현정 기자와 가진 인터뷰가 그 발단이다.

‘대통령 존전에서 독재자란 말을 쓰는 무례를 범했다.’ ‘인터뷰 중 인상을 썼다.’ ‘28번이나 대통령의 말을 중간에 잘랐다.’ 인터넷상에 쏟아지는 비난이다. 남편도 모자라 사촌동생 신상 털기와 함께 송 기자는 자칫 ‘역적’으로 몰릴 모양새다.

거기에 20여년 기자생활을 했다는 총리도 한마디 하고 나섰다. “신문의 ‘문’자는 ‘들을 문(聞)’자다. 그러나 많은 기자는 ‘물을 문(問)’으로 잘못 안다”고 말하면서 ‘신문은 새롭게 듣는 것’이라는 지금까지 듣도 보도 못한 자못 ‘혁신적 정의’를 내린 것.

진보세력의 대부로 자처하는 한 논객도 거들었다. “제일 큰 파문이 일었던 것은 (문 대통령에게) ‘독재자라는 말을 듣는 기분이 어떠냐’는 질문이었다”면서 문 대통령은 그런 캐릭터가 아니라고 감싸고 나섰다.

기자 개인의 의견을 말한 것도 아니다. “야당에선 대통령이 ‘독재자’라고 얘기한다”고 말한 것이다. 더구나 대통령에게 직설적으로, 비판적으로 캐묻는 건 자유민주주의 국가라면 당연한 일이다. 기자에게는 주어진 사명이다. 그런데 왜 그 난리인가.


본질은 충성, 더 심하게 말하면 아부 경쟁이다. 답은 여기서 찾아지는 게 아닐까. 친문 성향의 네티즌들은 일단 일편단심 충성심의 발로라고 쳐도 지명도 높은 여권인사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거들고 나선 것은 아무리 좋게 보아도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결과는 뭘까.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아부는 ‘벌거벗은 임금’을 만든다. 이 한마디로 압축되는 것이 아닐까.

그건 그렇다 치고, 그 젊은 서생은 어떻게 됐을까. 아부에 급급한 만좌한 세력가들을 통타한 그 야유가 마음에 들었던지 대원군은 따로 불러 벼슬을 내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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