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제대로 하지 못한 설거지

2019-05-08 (수)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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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적 충돌을 막고 평화적인 의사진행을 보장해야 한다며 6년 전 자신들이 만들었던 국회선진화법까지 마구 짓밟으며 난장판 ‘짐승국회’를 만든 자유한국당의 행태는 국회의 시계를 단숨에 과거로 되돌려 놓았다. 황교안 대표 선출 후 극우본색을 노골화하기 시작한 자한당은 이번 사태를 통해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지를 보다 분명하게 드러냈다. 그것은 지지층을 결집시켜 정치적 입지를 굳히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그 어떤 퇴행적 행위도 서슴지 않겠다는 목적지상주의 발상이다.

이들이 외쳐대는 구호와 주장을 듣다보면 헛웃음이 나올 정도다. 모든 것을 색깔론 프레임으로만 들여다본다. 기-승-전-좌파독재이다. 좌파는 대한민국 정치사에서 독재를 할 만큼 충분한 지분을 가져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혹독한 독재의 전력이 있는 수구가 할 소리는 아니다. 아마도 적지 않은 자한당 의원들이 입으로는 당의 구호를 외치고 난장판에 동참은 하면서도 내심 적지 않은 불편함을 느꼈을 것이다.

한때 소멸되고 잦아드는 듯싶었던 시대착오적 정치가 여전히 끈질긴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때그때 상황에 기회주의적으로 편승해 한층 더 기승을 부린다는 사실이 놀랍다. 이런 현상의 바탕에는 친일청산 실패라는 근대사의 원죄가 자리 잡고 있다. 청산되지 않는 친일세력이 한국사회의 기득권층을 형성해 왔다는 사실은 새삼스럽지 않다. 이들은 이승만과 박정희 시대의 반공 이데올로기에 편승해 자신들의 친일 흔적을 세탁하며 권력을 공고히 해왔다.


1987년 시민투쟁으로 민주화를 쟁취한 듯 보였지만 그럼에도 달라진 것은 거의 없다. 기득권층은 여전히 경제권력과 언론권력을 장악한 채 자신들의 이익을 지켜줄 정치적 보위세력 키우기에 골몰해왔다. 자한당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바로 이들과 맞닿아 있다. 그러니 자한당이 친일 언행을 반복하고 빨갱이 타령으로 일관하는 게 하등 이상하지 않다.

좀비 같은 생명력을 지닌 채 끊임없이 역사의 진보를 위협하는 수구의 발호를 보면서 떠올린 것은 정치학자 김영민 교수의 ‘설거지론’이다. 김 교수는 각 세대에 지워져있는 설거지 책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는 이 책임을 다하는 것이야말로 이른바 ‘세대 간 정의’에 부합한다고 말한다.

작금의 한국현실과 정치상황은 여러 세대에 걸쳐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설거지를 하지 못하면서, 즉 세대 간 정의를 세우는데 계속 실패함으로써 초래한 자업자득이라 할 수 있다. 해방 후 친일청산을 위한 ‘반민특위’가 만들어지지만 이승만에 의해 중용된 친일세력의 방해로 결국 역사청산은 흐지부지된다. 최근 논란이 된 “반민특위가 국민을 분열시켰다”는 나경원의 발언은 단순한 말실수가 아니다. 자한당 DNA 속에 감춰진 본색을 무의식적으로 드러낸 한 사례일 뿐이다.

며칠 전 문재인 대통령은 사회원로들과의 모임에서 통합과 협치를 위한 노력을 강화하겠다면서도 적폐청산에 대해서는 “타협이 어렵다”며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 당연한 일이다. 설거지를 하기 힘들다고, 혹은 하기 싫다며 옆으로 밀어놓는다고 해서 저절로 깨끗해지는 일은 절대 없다. 쌓아 놓은 설거지는 적폐가 되고 후대의 고통이 된다.

이제부터라도 우리 세대는 해야 할 설거지를 해야 한다. 이를 미루거나 더 이상 외면하고만 있기에는 악취가 너무 심하다. 더러운 흔적을 닦아내라고 국민들로부터 위임을 받은 정치인들이 소임을 다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많은 설거지거리를 만들어내는 현실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런 가운데 한국의 한 대표적 보수신문 고문이 쓴 ‘문재인 정권 심판 11개월 남았다’는 제목의 칼럼이 7일자에 실렸다. 칼럼은 현 정권에 대한 증오를 여과 없이 드러내면서 자유한국당의 육탄 전략을 두둔하고 옹호했다. “내년 총선에서 이기려면 박근혜를 내세워서는 안 된다”며 훈수 두는 것도 물론 잊지 않았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제 정말 11개월만 기다리면 된다는 간절한 마음은 나 또한 다르지 않다. 대한민국 역사의 기어를 ‘드라이브’에 놓을지, 아니면 ‘리어’에 놓을지를 국민들이 결정할 심판의 그날을 말이다.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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