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지금 여기서 함께 살아가는 인연

2019-04-19 (금) 권정희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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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금보고 마지막 날인 15일 충격적인 광경이 우리를 사로잡았다.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이 불길에 휩싸인 장면이었다. 전 세계 매체들이 현장보도를 계속하면서 파리의 저녁, 어두운 하늘을 배경으로 시뻘건 화마가 850여년 유서 깊은 유적을 훼손하는 과정을 우리는 고스란히 지켜보았다.

노트르담의 상징과도 같은 96m 첨탑이 제 안에 불을 안은 거대한 불기둥으로 변하고, 타오르는 불길 속에 기우뚱 허리가 꺾이며 무너져 내리더니 마침내 자취를 감춰버린 순간, 인근에 운집해있던 파리 시민들은 눈물을 흘리고, 수천수만 마일 밖 우리는 비탄에 젖었다. 가슴이 저며 드는 통증, 속이 타들어가는 안타까움, 그리고 휑한 상실감으로 그 순간 세계는 한 마음이었다. 같은 아픔, 같은 슬픔이었다.

파리 시민도 아니고, 프랑스 국민도 아닌 우리가 노트르담 대성당 화재에 비통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테러가 아니니 정치적 종교적 인종적 요인이 이유가 될 수 없고, 우리 개개인의 사사로운 삶에 어떤 불편을 초래할 가능성도 없다. 아마도 현실적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세상의 숱한 화재와는 구분되게 이번 화재가 아픈 이유는 어떤 근원적 연결의식 때문일 것으로 생각된다. 서구문명의 공격적 팽창으로 노트르담 대성당은 프랑스의 국보를 넘어 인류의 문화유산으로 자리매김했고, 동시대의 지구촌 가족으로서 우리에게 노트르담은 보편적 의미를 갖는다. 글로, 영화로 혹은 관광으로 대성당을 접한 문화적 경험이 노트르담을 자연스럽게 우리 삶의 언저리에 공통적으로 편입시킨 결과이다.

불타는 대성당을 보며 우리가 경험한 ‘한마음’은 문화가 연결해준 일체감 덕분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사람과 사람을 연결시키는 것은 대개 혈연 지연 학연이지만 그 어느 것으로도 인연 닿을 일 없는 낯선 사람들을 연결하는 또 하나의 힘으로 문화가 꼽힌다. 문화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경계를 허물고 하나가 되게 하는 힘이 있다고 굳게 믿는 사람이 있다. 세계적인 첼리스트 요요 마(63)이다.

대성당 화재가 나기 이틀 전인 지난 13일 요요 마는 텍사스 최남단의 도시, 러레이도에 있었다. 리오그란데 강을 사이에 두고 다리 건너면 바로 멕시코 땅인 국경도시에서 그는 평화 연주회를 열었다. 이 도시가 자매도시인 멕시코의 누에보 라레도와 공동개최하는 ‘행동의 날’ 행사를 축하하는 연주회였다.

음악으로 사람들을 연결시킨다는 취지로 지난해 ‘바흐 프로젝트’를 만들고 전 세계 36개 장소를 돌며 바흐의 첼로 곡들을 연주 중인 그는 트럼프의 반이민 정책 반대표시의 일환으로 이곳을 찾았다. 두 도시를 잇는 후아레스-링컨 다리를 배경으로 공연 후 그는 말했다. “문화를 통해 우리는 장벽이 아니라 다리를 만듭니다. 나라는 호텔이 아니지요. 꽉 차지 않습니다.”

음악 신동으로 대여섯 살 때부터 연주를 시작한 요요 마는 푸근하고 인간적인 음악가로 유명하다. 그가 낸 100여장의 앨범이 700만장 이상 팔리고, 그래미상을 18번이나 받았으며, 역대 8명의 대통령들을 위해 연주했고, 국가예술훈장 대통령자유훈장 등 각종 훈장을 받으며 음악가로서 더 할 수 없이 성공했지만, 그의 가장 큰 관심은 언제나 사람 그리고 포용이었다.

대만계 중국인을 부모로 파리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성장한 그는 경계인의 삶에 익숙하다. 서로 다른 문화, 전통, 세대의 차이를 몸으로 느끼며 다름을 화합으로 승화시키는 매개로 그는 음악을 믿고 있다. 특히 바흐의 음악이다. 바흐 음악은 우리를 보편적 인류애로 다시 연결시켜 주는 힘이 있다고 그는 말한다. 9.11 테러 희생자 추모 자리에도, 보스턴 마라톤 폭탄테러 희생자들을 위한 자리에도 … 그가 빠지지 않고 참가해 바흐를 연주하는 이유이다. 그가 태어난 도시 파리가 슬픔에 잠겼으니 머지않아 노트르담 앞에서도 그의 부드러운 첼로 선율이 울려 퍼질 것 같다.

세상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은 연결이다. ‘장벽’은 한계가 있다. 지구라는 행성에서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기적 같은 인연을 생각한다면 더더욱 공존이 답이다.


지난 10일 인류는 사상 처음으로 블랙홀을 관측했다. 지구에서 5,500만 광년 떨어진 곳에 있는 M87 은하에 속한 블랙홀이라고 한다. 블랙홀의 지름이 150억 Km로 태양보다 1만배 이상 크고, 지구보다는 110만배 이상 크다고 하니 우리의 지력으로는 상상이 불가하다. 그런 블랙홀과 무수한 별들로 이루어진 은하는 관측 가능한 것만 1,700억 개라고 한다.

무한대에 가까운 우주에서 먼지 같은 행성 지구가 형성된 것은 45억년 전. 그곳에 현생인류 호모 사피엔스가 등장한 것은 20만~15만 년 전이다. 우리가 지금 이곳에서 같이 살아간다는 것은 천문학적 확률의 특별한 인연이다.

노트르담이 불타고 맞는 첫 일요일, 21일은 부활절이다. 예수가 인류에게 명한 단 하나의 계명은 ‘사랑’이다. 우주의 시간으로 보면 개인도 국가도 찰나의 수명. 왜 사랑하지 않는가.

<권정희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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