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무대 위에서

2019-04-19 (금) 신은주 / 첼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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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전쟁이라도 났음 좋겠어.” 이렇게 무시무시한 발언을 학생 때는 주위에서 종종 듣곤 했다. 사회 정치적으로 불만을 가진 그룹에서 터져 나온 말이 아니다. 독주회를 앞둔 친구가 실토했던 것이다. 그것도 아주 성실히 준비하던 동료가 긴장감을 지레 느끼며, 일상을 멈추고 어디론가 도피하고 싶은 심정을 고백한 말이다.

연주회 무대에서 긴장을 느끼지 않는 솔리스트는 거의 없을 것이다. 거장들도 매번 동일하게 힘들다고 한다. 거장이 아닌 나 역시 마찬가지인데 앙상블 연주 때는 덜 하지만 독주회 때는 어김없이 신경이 곤두서곤 한다.

솔로 무대의 스트레스를 완화하는 나의 첫 준비는 그 전날부터 커피부터 멀리하는 것이다. 커피 애호가이기 때문에 이것이 쉽지는 않다. 긴장을 풀어주는 차로 대신하여 마신다. 당일은 내내 무대 오르기 직전까지 악보를 눈에 담으며, 잡생각을 떨치고 혹시 생길지 모를 실수를 방지하려 한다. 우리 때는 주로 청심환을 먹었는데 젊은 후배들 가운데 인데놀이라는 심계항진을 약화시키는 약을 처방받아 먹는 경우도 보았다. 각자 자신들만의 노하우가 있을 것이다.


피아노의 거장 마르타 아르헤리치는 중년 이후로 솔로보다는 앙상블 연주를 즐겨 했다. 무대 위의 고독감을 떨치고 싶다 했지만 혼자 연주할 때의 긴장감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무대 위에서 꽁꽁 얼어 연주를 망친다고 해서 인생을 망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어느 소프라노는 무대에서 긴장감에 노래 말을 까마득히 잊어버렸다. 그날은 힘들었으나 심기일전해서 나중에 훌륭한 성악가가 되었다고 한다. 일본 드라마에서도 주인공 노다메는 콩쿨에서 좋아하는 만화영화가 떠오르는 바람에 악보가 헷갈린다. 그렇지만 기대하던 입상은 못했어도 그녀의 사랑에는 일진보가 있었다.

어느 직종이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순간에 느끼는 긴장과 스트레스가 있을 것이다. 어느 드라마 작가는 초보 시절, 자신의 작품이 방영되는 저녁에는 두려움과 떨림으로 대한민국이 정전되기를 간절히 바랐다고 한다.

연주자는 일생 동안 무대와 더불어 산다. 대부분 숙명으로 받아들이며 담담히 준비하는 것 같다. 그러나 카리스마 넘치는 솔리스트가 음악과 무대를 거뜬히 장악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 그 뒤에 어떤 스토리가 담겨 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신은주 / 첼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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