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앵콜클래식] 사바하

2019-04-19 (금) 이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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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사바하’는 무섭지도 않고 선세이셔널한 영화도 아니다. 그러나 오컬트(호러) 영화로는 실패했지만 영화 자체로는 꽤 호평받을만한 영화였다. 관객 2백50만이 들어 손익분계점을 턱걸이, 흥행에는 별로 성공하지 못했다. 공포 영화로서 호불호가 갈렸기 때문인데 그러나 조금 다른 방향으로 바라보면 그동안 한국 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많은 질문을 던지게 하고 있다. 과연 종교는 그 자체로서 우리들에게 축복이기만한 것일까? 사실‘사바하’ 가 나오기 이전까지 종교의 어두운 면을 이처럼 적나라하게 파헤친 작품은 없었다고할만큼,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영화이기도했다. 물론 영화평론가들은 작품성이나 재미를 먼저 따지겠지만 종교적인 부분을 건드린 영화치고는 우연이었는지 의도적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꽤 찡한 맛을 남기기도 한다. 지난 2월 20일에 개봉한 영화로서 성탄절, 석가 탄신일 등을 겨냥한 작품도 아니었지만 어딘가 메시아적인 냄새가 가득했고 실체를 파헤쳐가는 영화의 줄거리도 서스펜스있다.

올 겨울은 유난히도 비가 많았다. 비는 사람들을 실내적으로 만들고 조금 우울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그런 날씨 때문에 사람들은 차분한 마음으로 책을 한 권 집어든다든지 좋은 영화를 한 편 보는 분위기속으로 젖어들기도 한다. 한 2주 전쯤 한 편의 영화를 봤는데 그것이 쏟아지는 비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영화가 주는 메세지 때문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가슴 속에 찡하게 울리는 그 무언가가 있었다.

‘검은 사제들’로 데뷔한 장재현 감독이 내놓은 2번째 장편으로 ‘사바하’라는 영화인데 범어 ‘Svaha’는 사전적인 의미로 ‘잘 말했다’ 혹은 ‘~이 이루어지소서’ 하는 뜻이 있다고 한다. 불교적인 제목이지만 영화는 (그러나) 제목과는 다르게 불교적이라기보다는 기독교적인 어떤 ‘신의 존재는 무엇인가’ 하는 묵직한 철학적 질문을 던지고 있다. 사이비 종교의 저격수 박웅재 목사는 ‘사슴동산’이라는 종교단체를 조사하다가 기이한 사실을 하나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강원도의 한 지역에서 태어난 1999년생 여아들이 차례로 실종되거나 사망한 채 발견되고 있는 것이 그것이었다. 그 사건에는 놀라운 비밀이 하나 숨겨져 있었는데 성불하여 불사의 존재가 됐다고 믿는 동방교의 교주 김제석이 자신을 죽이게 될 천적을 막기 위해 은밀히 해당 지역 소년범들을 모아 잠재적인 천적 81명의 여아들을 차례로 죽여가고 있는 것이 그것이었다. 마침 부활절도 다가오고해서 이 영화가 관객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없다고도 할 수 없는데 영화의 결론부터 맺자면, 이 영화는 인간 속에 내재한 이기적인 모습(악)과 이타적인 모습(선)을 극단적으로 대립시키고 있는데, 그 처절한 양면성 속에서 신을 일깨우기도 하고 충격과 감동을 느끼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악한 모습이 때때로 선한 모습으로, 선한 모습이 때로는 악한 모습으로 위장될 수 있다는 것이 이 영화가 주는 반전이기도하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두 자매가 등장하는데 하나는 귀신 울음 소리를 내는 괴물 아이이고 다른 하나는 다리를 저는 쌍둥이 중학생이다. 둘은 같은 날 한 배에서 태어났지만 어울릴 수 없는 사이였고 더욱이 흉칙한 모습으로 태어난 아이는 태어날 때 부터 동생의 다리를 물고 태어나 중학생이 되도록 다리를 절게 만든다. 소녀 금화는 괴물 언니가 하루 속히 죽길 바라며 농약이 가득 든 밥그릇을 언니의 방문 앞에 놓아둔 뒤 가출하게 되는데 이때 소녀의 눈에는 동정인지 회한인지 알 수 없는 눈물이 가득 흐른다.

무섭다기 보다는 슬프기도 한 이 영화는 오직 살기만을 바라는 악 그리고 그 악을 제거하기 위해 태어난 어느 괴물 소녀의 존재가 보는 이들의 가슴을 찡하게 하며 공동체로서의 양심의 가책… 하나의 목적을 위해 태어났지만 또 그렇기 때문에 절대자(神)로 부터 버림받은, 그 운명적인 고통이 보는 이의 가슴을 찡하게 한다.

예수는 십자가 상에서 ‘너 자신을 위해 울라’했다. 그것은 예수가 지극히 자비로운 사랑의 메신저였기 때문이 아니라 어쩌면 구원이라고하는 하나의 가치를 위하여 흘려야만했던 수많은 피를 예감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산다는 것은 어쩌면 다른 사람의 고통을 통해 내가 살아가는, 그런 고통의 수레바퀴인지도 모른다. 이 세상에 아픔없이 존재하는 것은 없다. 어머니의 고통이 나를 있게 하였고 아버지의 고난이 우리를 자라게 하였다. 농부들의 수고함, 산업전선에서 허리가 휘는 모두가 있기에 너와 내가 지탱되고 사회가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단 하나의 사명을 위하여, 소멸과 저주의 아픔을 몸소 껴안고 피를 흘린 순교자들의 피여… 부활의 빛으로 영광되게 하소서.

<이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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