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표현의 자유 vs. 아픔과 트라우마

2019-03-20 (수) 서동성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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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의 자유 vs. 아픔과 트라우마
갈고리 십자가는 한국에서 성장했거나 종교에 관심 있는 이에겐 불교나 사찰을 떠올리게 할 것이고 근대세계사, 특히 제2차 세계대전에 관하여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사람에겐 나치 당과 그들 천인공로하고 반인류적인 범죄를 저지른 집단의 상징인 스와스티카(swastika)를 연상시킬 것이다.

그 문양이 유대인이 많이 사는 페어팩스 지역의 한 공공건물 벽에 그려진 대형벽화 속에 선명하고 두드러지게 포함돼있다고 상상해보라. 아마도 그 벽화는 아예 그려지지도 못했을 것이고 설령 그림이 햇빛을 보았다 하더라도 세상에 나오자마자 곧바로 철거되었을 것이다.

LA 한인타운 한복판에 있는 공립학교 로버트 F. 케네디 스쿨의 욱일기 문양 벽화 논쟁이 다시 일어날 조짐이다.


문제의 벽화는 처음에 LA통합교육구가 지워버리기로 결정을 내리는가 싶더니 논쟁이 슬그머니 예술인 창작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억압한다는 엉뚱한 논리에 초점이 맞추어지면서 LA통합교육구는 결정을 유보하기에 이르렀고 LA타임스 등 언론 매체의 편파적 보도에 힘입어 여론도 그 쪽으로 기울었다.

스와스티카 문양이 담긴 벽화가 비단 유대인이 많이 사는 동네만이 아니라 미국 또는 서방세계 어느 곳에서도 버텨나지 못할 것인데 그 이유 중 하나는 히틀러 정권 때 저질러진 범죄가 그동안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반면 욱일기 밑에서 자행된 끔직한 범행에 대해서는 그만큼 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욱일기 문양이 들어있는 벽화를 반대하는 것이 예술가의 표현의 자유, 나아가서 미국수정헌법 제1항에 명시되어있는 언론의 자유를 억압한다는 논리는 쟁점의 초점을 엉뚱한 곳에 맞춘 억지논리이다.

욱일기 밑에서 자행된 범죄를 기억하는 이들에겐 욱일기 문양이 아직도 아물지 않은 상처에 한 번 더 소금을 뿌리는 잔인한 짓이고 집단적 트라우마를 새삼 겪게 하는 악랄한 행패다.

그렇기 때문에 벽화 반대운동에는 비단 한인뿐 아니라 난징학살을 기억하는 중국인, 욱일기 밑에서 비슷한 경험을 한 동남아계 주민들이 적극 참여했다.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와는 아무 연관이 없다.

스와스티카 문양이 포함된 작품이 유대인 동네 한복판 대형건물에 버젓이 걸려있다면 유대인들이 들고 일어날 것은 뻔한 일이고, 이를 표현의 자유를 막는 일이라고 반대의견을 전개하는 것 자체를 상상하기 어렵다.

LA통합교육구도 욱일기가 갖는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리고 아차 싶어 지우기로 결정했었는데 엉뚱한 논쟁이 일어나니까 엉거주춤하게 되지 않았나 싶다.


표현의 자유를 억압한다는 논리에 동참한 LA타임스의 미술평론가, 고기 타코를 개발하여 일약 유명 셰프 반열에 오른 미주 한인, 심지어 로버트 케네디의 두 아들 역시 욱일기 뒤에 이런 엄청나고 쓰라린 역사적 사실이 있었다는 것을 전혀 몰랐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이 일은 앞으로 계속 대처해나가야 한다. 그럴 때 우리의 주장이 표현의 자유나 언론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알릴 수 있다.

오로지 아직도 아물지 않은 상처를 건드리지 말고 민족적 트라우마를 다시 겪지 않도록 하는 배려를 원한다는 뜻을 미국사회에 전하는 방향으로 나가면서 동시에 동병상련을 나눌 수 있는 유대계 사회의 횡적지원도 모색해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서동성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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