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마추어가 보는 미국역사 (250)제37대 Richard M. Nixon 대통령⑧

2019-03-18 (월) 조태환/ LI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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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월남전에서 점차적 으로 손을 떼기 시작하면서 귀국하는 미군들이 늘어나고 징병도 줄어들자 미국내의 반전열기도 내려가기 시작하였다. 오랫동안 지속되었던 월남전쟁으로 혼란스럽고 극심한 inflation 으로 시달렸던 LBJ 의 경제를 인계받았던 Nixon 은 지속적인 경제정책의 적응효과로 재임 4년째인 1972년 여름에는 inflation 이 2.7% 로 하락하고 GNP 는 년 6.3% 로 증대하고 있었고 국민의 실소득은 년 4%씩 증대 하였고 1969년부터 가족당 평균연방 소득세가 20% 감세되었고 주식가격들이 상당히 상승하였다. 재출마를 계획하던 Nixon 에게 아주 유리한 호재들이었다.

한편 민주당은 당내의 불화합으로 형편이 어려웠었는데 “Tricky Dick” 이라는 별명이 붙은 Nixon 은 민주당의 약점을 최대로 이용하였었다. Nixon 측은 민주당의 골치덩어리 이었던 George Wallace 를 재정적으로 후원하였었고 민주당 후보중 신망이 있었던 Maine 주의 중도파 Edmund Muskie 상원의원을 반대하였으며 좌파 진보적이었던 George McGovern 상원의원이 민주당 공천자가 되도록 “공작”을 하였었다. 민주당 후보들간에 파괴적인 적대관계가 조성되도록 하기 위하여 한 후보의 이름으로 다른 후보를 비난하는 “가짜”문서 들을 돌렸었다.

또 마침 Muskie 상원의원은 자기의 부인을 부당하게 비난하는것을 항의하는 기자회견 도중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눈물을 보이자 언론들이 대통령이될 자질이 모자란다고들 바난하여서 일찌기 중도하차 하게 되었었다. 민주당에 더 상처를 주던 Wallace 주지사는 Maryland 주에서 선거유세도중 그를 혐오한 사람의 총탄에 맞아 하반신불수자가 되어서 별 쓸모가 없는 존재가 되어 버렸었다.


민주당 공천후보자들중 가장 당선 가능성이 약해보였던 McGovern 상원의원이 민주당 대통령후보가 되자 Nixon 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었다.

McGovern은 Missouri 주의 Thomas F. Eagleton 상원의원을 그의 부통령후보로 지명 하였는데 얼마후 Eagleton 상원의원이 정신과 치료를 받기 위해서 입원한적이 있었 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입장이 난처해졌었던 McGovern 은 처음에는 Eagleton 을 1,000% 지지 한다고 발표하였다가 여론이 분분해지자 Eagleton 을 밀어내고 JFK 의 매제인 Sargent Shriver 를 영입하였다. 이 “사건”은 McGovern 의 대통령 “판단론” 까지로 구설수에 오르게 되어 선거에 큰 악재로 작용하게 되었었고 Nixon 은 가만히 앉아서 횡재를 하였었다.

실제로 1972년 대통령 선거에서 얻은 Nixon 의 득표률 60.7% (4천7백17만표) 는 1964년의 LBJ 의 득표률 까지에는 미치지 못하였으나 미국 대통령 선거사상 기록에 오르는 것이었고 동시에 민주당의 낙선자George McGovern 상원의원의 득표률 29.1%(2천9백17만표) 는 미국역사상 양당후보로써 대통령에 출마 했던 사람들중 최하위 이었었다고 한다. 선거인단 투표수는 520 대 17 이었었다.

그렇게 landslide 로 압승한 Nixon 이 무슨 곡절로 21개월후에 대통령직을 떠나야만 했을까? 첫째로는 그의 타고난 천성이 가장 중요한 원인이 었겠지만 두째로는 첫임기중에 발생한 중요한 연쇄적인 사건들이 그를 지나치게 신경과민적이 되도록 만들었었다고 생각 된다. 그 사건들은 그에게 숙명적인 것이었는데 그는 매번 합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수습 하려 했던 과오를 범하였다고 생각된다.

“Pentagon Papers” 사건

일부 보수주의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미국 대통령들의 거의 “불법적”인 정보수집 활동은 관례적으로 오랫동안 계속되어오던 것으로써 소위 “진보적” 대통령들이 었던 FDR, JFK, LBJ 등의 민주당 대통령들도 다 해오던 활동이었었 다는 것이다. FDR은 국무성의 예산으로 11명의 Intelligence Unit 를 조직하여 백악관에 두고 각종의 정보수집에 이용하였으며 FBI, IRS, 법무부 등을 사용하여 그의 적들, 정책에 반대하는 기업인들과 언론들을 괴롭히고 전화를 불법도청 하였으며 IRS에서 얻은 정보로 Enemy List 도 작성하였었다고 한다.

그가 특별히 싫어하였던 Chicago Tribune을 법정에 서도록 만들었으며 New York Times 를 탈세혐의로 기소 되도록 하였었다고 한다. Truman 과 Eisenhower 는 적극적으로 탈법적인 활동은 자제하였으나 CIA 등의 해외공작들은 알면서도 불가피한 것으로 생각하여 묵인하여 왔었다고 한다. JFK 때에 다시 탈법적인 정보, 공작활동등이 재개되었는데 그는 월남의 Ngo Dinh Diem 이 CIA 의 배후조종에 의한 군사구테타로 붕괘되는것을 묵인하였다고 하며 CIA 가 Castro 암살계획을 하는것을 알고도 묵인하였었 다고 한다.


RFK 가 법무부 장관이 었을때 JFK 의 경제정책에 순응하지 않았던 U.S. Steel Corp. 의 사장집에 폭발물이 터지도록 하였다고도 하며 우파적 언론들과 TV 들을 여러가지 방법으로 괴롭혔으며 IRS 를 이용해서 enemy 들을 감사하도록 하였었다고 한다.

JFK 와 LBJ 대에 이르러서 전화도청, 녹음 등이 급증 하였었고 LBJ 와 관계가 소원해지기 시작하자 King 목사를 견제하기 위하여 그의 여러번 있었다는 혼외 정사녹음들을 신문편집자들의 모임에서 들려주기도 하였었다고 한다. FDR 이 Eleanor 와의 관계가 불편했던 오랜기간동안 FDR 의 곁에 있었던 여인과의 친밀함은 널리 소문이 났었고 JFK 도 대통령 선거운동중이나 심지어 Jackie 의 부재중에 백악관에서 까지 Mafia 두목의 girlfriend 를 포함한 외부 여인들과 정사한것을 많은 기자들이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들 침묵하였 었다고 한다.

세기적 육체파 여배우 Marilyn Monroe 와는 JFK, RFK 형제가 관계했다는 염문이 공공연 하였으며 그녀의 “자살”이 명확히 규명되지 않은것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이상의 얘기들은 상당히 근거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은 되지만 주로 Nixon 이 유별나게 나쁜 대통령이 아니었었는데 “진보적인 좌파” 언론들이 Nixon 만을 올가미를 씌워서 나쁜사람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했던 “우파 보수주의자”들의 주장이다.

실제로 Nixon 의 대통령 취임후에 Washington Post 와 New York Times 를 필두로 한 진보계열의 언론들은 지속적으로, 독설로써, 자제함이 없고 창조적이며 거의 불법적인 수준의 기사들을 내보내기 시작 하였었다고 한다. 이와같은 언론의 “횡포”를 Nixon 은 각오하고 있었으나 “국가비밀”이 절도되고 팔리고 기타의 방법으로 유출되어서 그런 신문들에 전달되고 종국에는 언론들에 여과없이 보도되는것은 용납할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헌법에 언론의 자유가 보장된 미국에서는 이러한 “국가비밀”의 유출도 통제할수있는 법이 없었다. 이와같은 상태를 고위 외교관들과 군부 지도자들은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Kissinger 국무장관은 비밀이 계속 유출되는한 월람전 종식을 위한 중국, 쏘련등과의 비밀협상들과 북월남과의 협상을 할수 없다고 강력히 주장하였다.

Nixon 이 대통령에 취임한 이후에 국가비밀문서가 언론에 보도되는 사태가 급증 하였었다. Nixon 이 취임한후 5개월 동안에 국가비밀로 규정된 국가안보위원회 (NSC) 의 문서들이 New York Times 와 Washington Post 에 21회나 보도 되었었다고 하며 그해 년말쯤에 CIA 는 국가비밀이 그대로 노출된 45건의 언론보도 사례List 를 백악관에 보고하였었 다고 한다. 이런 성격의 언론보도로 미국인 사상자가 얼마나 발생하였는지는 정확히 계산하기는 어려운 일이었지만 미국의 국가안보가 크게 위협을 받았을 것은 분명한 일이었다.

<조태환/ LI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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