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직도 넘어야 할 산

2019-03-18 (월) 여주영 뉴욕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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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이 2차 세계대전 때 저지른 종군위안부 만행은 여전히 속 시원히 해결되지 않은 채 미완으로 있다. 종전 80년이 다 되도록 아직까지 일본정부가 자신들이 저지른 이 만행에 대한 피해보상은커녕, 사죄와 반성할 기미조차 보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저지른 일들은 이미 작고한 위안부는 물론, 아직까지 생존해 있는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로 남아있다.

13~18세의 어린 소녀들은 단지 돈을 벌게 해준다는 말에 속아 일본군 초소에 위안부로 끌려가 이들의 성노예가 되어 수년간 갖은 치욕과 만행을 겪었다. 이들은 일본의 패망으로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몸이 만신창이가 되어 가족과 사회로부터 외면을 당하고 평생 수치감 속에서 살다 쓸쓸히 죽어갔다.

남은 위안부는 현재 22명. 무고한 이들이 이런 끔찍한 고통을 겪은 것은 당시 한국이 약소국인데다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이 역사적 범죄를 놓고 한국은 일본 측에 철저한 사과와 반성을 촉구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 안에서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여성에 대한 이런 잔인한 행위가 과연 남의 나라에 의한 것뿐일까 라는 생각이 든다. 당장 한국 내에서도 여성들을 짓밟는 남성들의 인권유린 행위가 지금도 곳곳에서 버젓이 벌어지고 있다.

2009년도 한국을 들끓게 했던 27세 여배우 장자연이 죽기 전 남긴 한 문건만 보아도 이러한 사실을 충분히 가늠하게 한다. 문건에는 장씨가 소속사의 온갖 폭행과 협박에 못 이겨 술 접대와 성 접대를 해야 했던 정황이 그대로 담겨 있다. 접대자 명단에는 언론사 사주를 포함, 기업인, 방송인 등 고위층 인사들이 들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 사건은 10년이 넘도록 아직까지 진실이 밝혀지지 않고 있다.

미국에서 발발한 ‘미투(Me Too)’운동으로 남성들의 성추행사건이 연달아 폭로되면서 이 운동은 한국사회에까지 파급돼 법조계에서 처음으로 여성검사 서지현이 자신이 당한 성추행사건을 용감하게 폭로하고 나서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 운동은 한국문단과 영화계, 체육계로까지 확산됐다. 그동안 당하고도 가슴앓이만 하던 여성들이 여기저기서 들고 일어나 남성들에게 적지 않은 충격과 일깨움을 주었다.

미투 운동이 피해자를 지지하는 ‘위드 유(With You)’라는 선언으로까지 확대돼 한국 남성들을 크게 변화시키지 않을까 하는 바람을 갖게 했다. 하지만 요즘 한국에서 전개되는 상황을 보면 남성들의 의식이 달라질 것 같은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유명가수 승리가 투자자에게 성접대를 한 혐의로 피의자 신세로 전락하는가 하면, 가수 정준영이 여성들과 성관계를 가진 사진과 동영상을 불법으로 촬영하여 단체 카톡방에 유포하는 사건 등이 드러나면서 회의감은 더욱 깊어진다. 정준영이 친구에게 한 여성과 가진 성관계를 자랑하고 친구가 “영상 없냐?”고 되묻자 정씨가 불법 촬영한 영상을 보내놓고 주고받는 대화내용을 보면 너무 충격적이어서 차마 옮기기도 어렵다. 이런 식으로 피해를 본 여성이 파악된 것만도 10여명이나 된다고 한다.

이들 피해 여성들은 말할 수 없는 수치심으로 평생 고통 속에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런데도 가해자들은 별로 죄의식이 없어 보인다. 오로지 자신의 쾌락을 위해 여성을 물건 취급하며 인권을 마구 짓밟고 유린하는 것이다. 전반적인 한국사회의 병든 상황은 국가의 앞날이 걱정될 정도이다.

지난 8일은 세계 여성의 날이었다. 이날은 여성들이 더 나은 삶을 위해 직장과 사회로부터 당하는 남성과의 차별, 폭력, 편견 등에 대해 털어놓고, 이제 그만 이런 불공정한 행동을 멈추라고 요구하는 날이다. 정말 우리가 넘어야 할 산은 여성들을 잔인하게 밟고 유린하는 이슈들을 해결하고 극복하는 것이다. 미투 운동도 안 되고 위드 유 운동도 미치지 않는다면 얼마나 무엇을 더 해야 남자들의 의식이 바뀔 것인가 답답하기만 하다.

<여주영 뉴욕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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