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눈도장을 찍어라”

2019-03-16 (토) 윤재현 전 국방군수청 안전감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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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들리지 않는다. 노후대책에 관한 강연회였다. 초청연사는 강연을 거침없이 잘하는데 웬일인지 알아듣기가 힘들다. 그는 기관총 쏘듯이, 누구에게 쫓기듯이 말을 빨리했다.

연사는 청중이 그의 연설을 듣고, 평가하고 소화할 수 있는 틈을 주어야 한다. 모든 대중연설은 일방적 의사 전달이 아니고 대화가 되어야 한다.

“노인은 과거를 자랑하지 말라”는 불문율을 한번 깨보려 한다. 웅변대회 우승 이야기이다. 1971년 한국에서 한 영자신문(Korea Herald) 주최 영어 웅변대회 일반부에서 우승하고, 미국에 이민 와서 2년 후인 1976년 하와이 토스트마스터 웅변대회에서 원어민 경쟁자들을 제치고 우승을 했다.


왜 웅변에 그렇게 관심이 많았을까. 어려서부터 말더듬이 증상이 있어 의사표현에 어려움을 겪은 탓이다. 아직도 그 그루터기가 남아서 내 말이 부드럽지 못하고 딱딱함을 사람들은 감지할 수 있다. 말더듬이 증상을 고치려고 무척 애를 썼다. 눈물을 삼키며 교정을 받았다. 그때 얻은 교훈이 있다. “말을 더듬지 않겠다는 것보다 말을 더 잘 하겠다”는 적극적 태도였다.

그래서 한국과 미국에서 영어 웅변클럽에 가입하여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였다. ‘영어의 바다’에 뛰어들었다. 익사하지 않고 살아남았다. 그리고 국방부 공무원으로 평생 일하고 은퇴했다. 그러므로 나는 웅변의 노하우, 다시 말하여 ‘How to make your speech tick‘을 어느 정도 알고 있다. 앞으로 출세할 청소년들과 현직 전문인들에게 나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대중연설의 요령을 소개하고 싶다.

첫째, 연설하지 말고 대화를 하라. 청중을 ‘향하여’ 연설하지 말고 청중과 ‘같이’ 대화하면 된다. 얼핏 생각하면 어려운 것 같지만 생각과 태도를 바꾸면 된다. 누구나 자기가 말하는 스타일이 있다. 친구들과 어울려서 이야기하는 몸가짐, 얼굴표정, 눈길, 목소리 등 자기의 말솜씨를 그대로 옮겨놓으면 된다.

둘째, 그렇게 하려면 눈 맞춤을 해야 한다. 단상에 올라가 청중을 한번 대충 훑어본 다음 한 사람, 한 사람 약 5초씩 눈을 맞추고 이야기한다. 한쪽 사람들만 보는 게 아니라 골고루 눈을 맞춘다. 말하자면 눈도장을 찍는 것이다. 눈 맞추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에, 연설하기 전 사람들에게 말을 걸어 사귀어 놓고 연설할 때 그들과 눈을 맞추는 것도 한 방법이다.

셋째는 ‘멈춤(pause)’과 ‘위엄(poise)’이다. 글 쓸 때 단락 없이 지면을 글자로 가득 채우면 독자들이 읽기 힘든 것처럼 연설할 때도 멈춤이 필요하다. 이 멈춤을 잘하는 사람이 오바마 대통령이다. 어떤 때는 침묵이 너무 길어서 불안하게 느껴질 즈음 말이 튀어나온다. 멈춤은 밥 짓는데 뜸을 들이는 것과 마찬가지다. 청중을 압도하려면 멈춤과 위엄을 적당히 사용해야 한다.

성공적 대중연설은 재미있고 의미있고 감동을 주는 내용이라야 한다. 한국 영자신문 웅변대회에서 나는 ‘선전포고 없는 전쟁(An Undeclared War)’이라는 제목으로 교통사고로 인한 한 가정의 비극을 다루었다. 하와이 토스트마스터 웅변대회에서는 중국 고사에 나오는 ’새옹지마(塞翁之馬, SaeOng‘s Horse)’를 제목으로 이야기했다. 가족 중 한사람이 신체검사 불합격으로 이민비자 수속에 문제가 생기면서 불안과 고통을 체험한 내용이었다. 결국 전화위복으로 끝났지만.

나는 이 스토리를 옆 사람에게 말하듯 ‘pause’와 ‘poise’를 주어가며, 유창한 발음보다 정확한 발음으로 이야기했다. 사람들이 티슈로 눈물을 닦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기립박수를 받았다.

대중연설은 대화가 되어야 한다.

<윤재현 전 국방군수청 안전감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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