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국가원수 모독하기

2019-03-15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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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아득한 추억 같은 이야기지만 한국에서 말 한 마디 잘못하면 감옥에 끌려가던 시절이 있었다. 1972년 ‘10월 유신’이란 이름으로 궁정 쿠데타를 일으켜 종신집권의 길로 들어선 박정희는 헌법적 효력을 가진 긴급조치라는 것을 발동시켜 유신헌법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투옥하고 고문했다.

총 9차례 발동된 긴급조치 중 가장 중요한 1호의 첫번째 조항이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 반대, 왜곡 또는 비방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이고 2항은 ‘대한민국 헌법의 개정 또는 폐지를 주장, 발의, 청원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3항은 ‘유언비어를 날조, 유포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였다. 1호는 5호로 해제됐다 9호로 다시 부활한 후 1979년 박정희가 암살되고 1980년 새 헌법이 제정되면서 사라졌다.

박정희는 긴급조치만으로 부족했는지 1975년 형법에 ‘국가 모독죄’라는 것을 신설했는데 그 내용은 ‘헌법에 의해 설치된 국가기관을 모욕 또는 비방하거나 그에 관한 사실을 왜곡 또는 허위사실을 유포한 때에는 7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에 처한다’는 것이다. 이 법은 1987년 민주항쟁을 거쳐 1988년 폐기된다. 이때 이 법 폐지에 앞장 선 사람의 하나가 지금 집권당인 더불어민주당 대표로 있는 이해찬이다.


한동안 추억 속에 묻혀 있던 이 법이 요즘 다시 세간의 화제가 되고 있다.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국회연설에서 문재인 대통령 보고 더 이상 ‘김정은 수석대변인’ 노릇을 하지 말라고 하자 이해찬이 발끈해 이를 ‘국가원수 모독죄’에 해당하는 행위라고 주장한 것이다.

이해찬 나이가 60대 후반인 점을 고려하면 이해가 가는 면이 없지는 않지만 자신이 민주화 운동을 하며 폐기에 앞장서 사라진 법을 가지고 야당 원내대표를 엮으려 하는 모습은 참으로 민망스럽다.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악랄한 악법으로 지탄받는 긴급조치 9호조차 ‘국회의원이 국회에서 직무상 행한 발언은 이 조치에 저촉되더라도 처벌되지 아니한다’라고 명시했다. 유신시대에도 보호되던 면책특권을 소위 ‘촛불 민주세력’을 자처하는 현 집권여당이 짓밟으려 하는 것이 말이 되는가.

‘국가원수 모독죄’는 소위 민주화 세력이 보수정권을 비판할 때 단골로 써먹던 소재다. 불과 5년 전 지금 청와대 민정수석인 조국은 신문기고를 통해 ‘국가원수 모독죄는 황당한 죄목, 유신의 추억’이란 글을 썼다. 당시 새정치연합 소속이던 설훈 의원이 박근혜 대통령의 연애를 거론하자 박근혜가 “대통령을 모독하는 발언이 도를 넘은 것”이라 비판했는데 이를 조롱한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사정이 바뀌어 이제 집권세력이 되자 문재인에 대한 비판은 못 받아들이겠다며 펄펄 뛰고 있는 것이다.

지금 ‘국가원수 모독죄’가 가장 철저히 시행되고 있는 나라는 북한이다. 김씨 일가에 대해 입 한 번 잘못 놀리면 3대가 멸문의 화를 입는다. 반면 미국은 트럼프를 아무리 조롱해도 잡혀갈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지금 한국의 집권세력은 어느 나라를 닮으려 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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