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흑인으로 산다는 것”

2019-03-12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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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로라도 주의 평화롭고 아름다운 대학타운 볼더에서 일요일인 10일, 경찰의 인종차별에 항의하는 시위가 열렸다. 흑인과 백인, 어른과 아이들 600여명이 참가한 이날 시위행진엔 “쓰레기 청소는 범죄가 아니다”란 피켓과 함께 청소도구를 든 참가자들이 군데군데 눈에 뜨였다.

지난 1일 자신이 사는 학생 공동숙소의 뒷마당에서 쓰레기를 치우던 한 흑인 대학생에게 경찰이 다가가 “이 ‘사유지’에 들어오는 허가를 받았느냐”고 물었다. 흑인 청년은 여기에 산다고 대답한 후 학생증을 보여주었다. 경찰은 더 수사해야 한다면서 그를 계속 제지했다.

청년이 부당한 대우에 화를 내자 경찰은 그가 “비협조적이며 둔기를 내려놓지 않으려 한다”면서 지원을 요청했고 곧 7~8명의 경찰이 들이닥쳤다. 경찰이 총을 뽑아들며 흑인 청년에게 내려놓으라고 외친 ‘무기’는 쓰레기 집게였다.


숙소 거주자들이 개입해서야 경찰의 검문 소동은 중단되었고, 흑인 대학생은 체포되지 않았다. 그러나 목격자가 촬영한 동영상이 온라인에서 급속히 퍼져나가고 각 미디어에서 보도되자 경찰당국은 자체수사에 들어갔고 사건의 발단인 경찰관은 유급 휴직에 처해졌다.

경찰이 흑인 등 유색인종을 잠재적인 범죄용의자로 간주해 정당한 이유 없이 검문하는 인종 프로파일링은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니다. 인종차별은 위법이지만 거의 본능적 편견은 여전히 사람들 마음 깊숙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2018년엔 편견 속에서 “흑인으로 산다는 것” 때문에 일어난 사건의 보도가 물결을 이루었다. 흑인들이 단순히 ‘백인 공간’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의심을 받고 검색을 당하는 케이스가 빈번히 발생했는데 경찰의 검문 못지않게 잦은 것이 백인주민들의 근거 없는 911 신고전화였다.

친구를 기다리던 두 흑인고객을 “아무 것도 주문하지 않는다”고 경찰에 신고한 스타벅스 커피샵 케이스만이 아니다. 오리건 호텔 로비에서 전화를 하던 흑인 투숙객, 백인아이들을 돌보던 흑인 베이비시터, 물을 팔던 흑인소녀, 서브웨이에서 샌드위치를 사먹던 흑인 가족, 예일대 기숙사 공동구역에서 낮잠 자던 흑인 대학생, 자신의 아파트에 들어가려던 흑인 입주자…일상생활 중 졸지에 경찰에 신고당해 “흑인으로 산다는 것”을 체험한 사람들은 너무나 많다.

신고대상이 된 흑인들은 경찰의 고압적 심문에 공포를 느끼고 스트레스와 분노에 시달린다. 가해자들은 대부분 별 비난도, 실질적 책임추궁도 당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젠 변하고 있다.

지난주 디트로이트 흑인남성 마크 피플즈는 2017년부터 1년여에 걸쳐 계속 여러 혐의를 조작해 자신을 경찰에 신고했던 3명의 백인여성들을 상대로 30만 달러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도시농부’인 피플스는 한 공원의 빈터에 밭을 갈아 작물을 심는 일을 하는데 이 동네 여성들이 피플스를 드라이브바이 슈팅, 스토킹, 소아성애증 전과자 등으로 몰아 경찰에 수차례 신고한 것. 경찰까지 덩달아 피플스를 스토킹 혐의로 구속했으나 지난 10월 재판에서 판사는 “터무니없다”면서 케이스를 기각시켰다.

무죄는 증명됐으나 변호사비 등을 부담해야 했던 피플스의 이번 소송은 무고당한 흑인들의 보다 강력한 법적대처의 시작이 될 것으로 주목받고 있다.

‘흑인으로 산다는 것’의 현실을 지켜보며 노골적 반이민 언행이 점점 당당해지고 있는 미국에서 ‘이민으로 산다는 것’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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