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내 얘기 좀 들어 주세요”

2019-02-23 (토) 12:00:00 김순진 교육심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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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교외에 살고 있는 K여사는 한국에서 같은 학교에서 교직생활을 했던 직장선배이다. 이후 수년 간격으로 미국으로 이주해서, 40년 넘는 이민생활을 함께 해온 이민동기이기도 하다.

그의 세 자녀는 한국에서 초등학교에 다니다가 미국에 와서 ESL 클래스부터 시작해 모두 동부에 있는 명문대학으로 진학한 영재들이다.

맏이인 딸은 컴퓨터공학을 전공해서 뉴욕에 있는 하이텍 회사의 중역으로, 둘째인 아들은 의대를 나와서 역시 뉴욕에서 내과의사로, 막내아들은 사회학을 전공해서 워싱턴에서 정부공무원으로 일하고 있다.


미국이민의 가장 큰 목표가 자녀교육이라는 한국인들의 정서에서 볼 때, 이 부부는 이민생활의 성공사례로 꼽힐 수 있다.

세 자녀 모두 대학을 졸업하고 그곳에서 직장을 얻고 결혼해서 살고 있고, 부부는 매년 명절이면 뉴욕으로, 워싱턴으로 여행하면서 만족스러운 노년을 보내왔다.

근 60년을 함께 살았던 남편이 5년 전에 세상을 떠나면서 K여사의 생활에 큰 변화가 찾아왔다. 텅 빈 집에 혼자 살면서 매일 세끼 해먹는 것부터, 청소, 세탁, 청구서 처리, 부쩍 잦아진 병원 가는 일이 보통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런 부담보다 더 힘든 것이 아침에 일어나서 하루 종일 말을 나눌 상대가 없다는 것이었다.

어쩌다 친지 친구들과 통화를 하게 되어도 그들은 오래 밀렸던 자신들의 얘기하느라 바빠서 상대방의 얘기는 듣는 둥 마는 둥하기 일쑤였다.

저마다 자기 몸 아픈 얘기와 살아가면서 생기는 사소한 불평만 늘어놓다가 통화를 끝내는 경우가 많다고 K여사는 말했다.

그런 그에게 친지들은 왜 동부로 이사 가서 자녀들 가까이 살지 않느냐고 묻지만, K여사는 50년 가까이 살아온 이곳을 떠나서 낯선 데로 이사할 용기도, 의사도 없다고 했다.

아직 건강을 유지하고 있으니까 시설 좋고 서비스도 만족할만하고, 자신의 경제력에 맞는 노인시설에 입주하라는 권유도 듣지만, 이런 저런 이유로 이 역시 내키지 않는단다.
이런 엉거주춤한 상태로 살고 있지만 조만간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다고 한다.


한인들의 이민역사가 길어지고 평균수명이 길어지면서, K여사와 같은 경우를 주위에서 직접, 간접으로 많이 보고 듣는다.

3대가 으레 한집에서 함께 살던 시대는 지난 지 오래지만, 노년의 부모세대가 어떻게 여생을 품위 있고 편안하게 보낼 수 있을 지에 대한 대책은 자리 잡지 못한 상태이다. 각자가 처한 형편에 따라 그때그때 정해지는 것이 현실이다.

사실 K여사는 남편이 살아있을 때부터 한동네에 사는 한인가정을 보며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 가정에서는 한두 달에 한번이라도 주말이면 자녀들이 손주들을 데리고 와서 늙은 부모와 함께 시장에 가고, 점심도 같이 먹고 하며 시간을 보낸다고 한다.

그런 모습을 보며 자신도 세 자녀 중 하나라도 캘리포니아에 있는 대학에 보내서 가까이 자리잡고 살 게 할 걸 하는 후회가 많다고 한다.

자녀들 교육에만 신경 쓰느라 노년을 생각하지 못한 자신의 단견을 탓하면서, 늙어갈수록 점점 이기적이 되는 자신의 모습에 쓴 웃음을 지을 때가 많다는 K여사의 고백이다.

K여사의 모습에서 나 자신의, 또 다른 많은 한인노인들의 자화상을 보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김순진 교육심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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