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부자들의 세금

2019-02-15 (금) 권정희 주필
작게 크게
회계법인 H&R 블록은 올해 세금보고 시즌 시작 전에 세무담당 직원들에게 클래스 하나를 의무적으로 듣게 했다고 한다. 감정이입 훈련 클래스이다. 기대만큼 실망이 커서 필시 열 받을 고객들의 심정을 미리 공감해보는 훈련이다.

예를 들면 이렇다. 지난해 세금보고 후 1,500달러를 환급받은 고객이 있다고 하자. “세금 확 깎아 준다”는 대대적 홍보 속에 2017년 통과된 트럼프 개정세법이 시행에 들어갔으니 “이번에는 얼마나 많이 돌려받을까?” 기대가 높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환급은커녕 오히려 575달러를 더 내야하게 되었다면 어떨까?

H&R 블록의 공감훈련 클래스는 이런 고객과 세무직원 간 주고받을 가상의 대화를 토대로 진행되었다. 세금보고 후 뒤통수 맞은 기분일 고객들이 많을 것이라는 예상을 전제로 한 클래스이다.


세금보고가 막 시작된 지금 국세청(IRS)이 조기 세금보고자들을 대상으로 한 통계에 의하면 올해 평균 환급액수는 지난해에 비해 8.4% 줄었다. 세금은 개개인의 천차만별 재정상황에 따라 다르지만 표준공제액수가 늘어난데 반해 특정 세금공제 항목들이 축소되거나 사라지면서 세금보고 시즌의 희비가 예년과는 좀 다르게 펼쳐지고 있다.

그렇다면 올 세금보고, 다시 말해 트럼프 세금감면으로 가장 신나는 사람은 누구일까. 최대 수혜자는 부자들과 기업들이라는 분석이다. 부자들과 기업들이 세금 아낀 만큼 더 많이 투자하고, 직원들에게 더 많이 나눠줄테니, 미국경제를 위해서 좋은 일이라고 박수만 치기에는 석연찮은 부분이 있다.

쥐꼬리만 한 환급에 웃고 우는 보통 시민들에게는 의문이 찾아든다. 세금 낼 돈 넘치게 많은 사람들의 세금은 줄여주면서 먹고살기 빠듯한 서민들 세금은 왜 꼬박꼬박 챙겨 가는가 하는 의문, “왜 항상 그들만의 잔치일까?” 하는 상대적 박탈감이다.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이니 트럼프에게 부자들과 기업들의 이해가 먼저 가슴에 와 닿을 것은 명약관화, 부자들과 기업들의 후원과 로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의원들 역시 그들의 이익을 외면할 수 없는 것 또한 인지상정. 그렇다면 서민들의 박탈감을 덜어줄 해법은 없는 것일까.

부자들의 세금과 관련해서 현재 두 그룹이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부자 증세’라는 같은 주장을 펼치는 일부 부자들 그리고 민주당 의원들이다.

전자는 ‘애국적 백만장자들(Patriotic Millionaires)’이라는 조직을 만든 ‘별종’ 부자들이다. 연방정부와 각 주정부 의원들을 만나 ‘부자 증세’ 캠페인을 벌이는 한편 이를 지지하는 정치인들을 후원한다. 이들의 주장은 이렇다.

“트럼프 개정세법으로 우리는 적게는 수만 달러, 많게는 수백만 달러의 세금을 절약했다. 이 액수는 우리에게 별 의미가 없다. 하지만 이런 감세는 국가를 위해서 좋은 일이 아니다.” 예를 들어 10억 가진 사람에게 300만 달러는 1만 달러 가진 사람에게 30달러 수준. ‘30달러’ 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세금으로 거둬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정치권에서 부자 증세를 주장하는 대표적 인사는 민주당 대선후보 출마를 공표한 엘리자베스 워렌 연방상원의원. 고질적 경제 불평등 해소 방안으로 그는 최상위 부자들에 대한 증세(Ultra Millionaire Tax)를 주장한다. 대상은 최상위 0.1%(20만 가구). 이들이 소유한 부가 하위 90%(1억1,000만 가구)가 가진 부와 맞먹는다고 그는 관련 연구를 근거로 주장한다. 워렌은 순 자산 5,000만 달러를 기준으로 그 이상에 대해 달러 당 2%, 그리고 10억 달러 선을 넘어선 부에 대해서는 달러 당 3%의 세금을 부과하자는 안을 내놓고 있다.

너무 많이 가진 사람들이 너무 적게 가진 사람들과 나눈다면 세상은 얼마나 살만할까. 유감스럽게도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다.

최고 갑부 제프 베조스의 아마존 직원들은 ‘15달러 싸움(Fight for $15)’을 오래 벌였다. 최저임금을 15달러로 올려 달라는 이 요구를 회사 측이 지난해 10월 수락하기까지 여러 해가 걸렸다.

베조스가 빌 게이츠를 제치고 최고 부자로 올라선 2017년 가을 그의 부는 한 달 사이 100억 달러가 늘어났다. 1초 마다 4000 달러씩 불어났다는 계산이다. 당시 아마존의 최저임금 직원은 25만명 정도. 직원들은 시간 당 2~3달러의 인상을 요구했다. 베조스가 한 두시간 늘어나는 돈만 없는 셈 치면 이들의 주급이 해결되는 액수였다.

정의로운 사회란 부, 권리, 기회 등이 올바르게 분배되는 사회.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평등하다고, 행복하다고 느끼는 사회. 모두의 소유가 똑같을 수 없는 사회에서 과세는 부의 재분배 기능을 갖는다. 부자라고 무조건 많은 세금을 강요받아서는 안 되겠지만 특혜 또한 부당하다. 갈수록 양극화하는 사회에서 ‘부자들의 세금’은 2020 대선의 주요 이슈가 될 전망이다.

<권정희 주필>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