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파인애플 익스프레스’

2019-02-15 (금)
작게 크게
가주에 살면서 날씨와 관련해 가장 많이 듣는 용어의 하나로 ‘엘 니뇨’란 말이 있었다. 태평양의 수온이 평소보다 높아지는 현상으로 이렇게 되면 비가 많이 온다는 것이 얼마 전까지 통설이었다. 남가주 사상 가장 많은 비가 내린 해의 하나인 1982~1983년 우기가 ‘엘 니뇨’와 함께 오면서 이는 기정사실로 받아 들여졌다.

그러나 가주가 극심한 가뭄에 시달리고 있던 2014~2016년에 1982년을 능가하는 ‘엘 니뇨’ 현상이 발생했음에도 비는 별로 내리지 않았다. 오히려 바다 온도가 평소보다 내려가는 ‘라 니냐’가 온 2017년 많은 비가 내렸다. 이제 전문가들은 ‘엘 니뇨’와 비는 별 관계가 없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엘 니뇨’가 강우량 변화 주요인에서 제외되면서 대신 ‘대기의 강’이 주목을 받고 있다. 하늘에 떠있는 수증기를 잔뜩 품은 대기의 흐름을 일컫는 ‘대기의 강’은 지구 전역에 걸쳐 있는데 그 중 북태평양 하와이 부근에서 발생해 동쪽으로 이동하는 것에 ‘파인애플 익스프레스’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가주를 비롯한 미 서해안 강수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전문가들은 이것이 미 서안 지역 강수량의 30~50%를 공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이 ‘대기의 강’ 하나가 품고 있는 물의 양은 미국에서 제일 큰 미시시피 강의 7배에서 15배로 어마어마하다. 이처럼 중요한 역할을 하는 기후현상임에도 아직 그 원인과 향후 추세에 관한 연구는 별로 없다. 그 존재가 알려진 것이 불과 20여년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가주 최악의 홍수로 불리는 ‘1862년 대홍수’도 이 때문인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이때 서해안 일부 지역에서는 45일 연속 비가 내렸으며 2,600mm의 강우량을 기록했다. 2005년 남가주를 강타한 폭우도 이 때문으로 샌 개브리엘 일부지역에는 5일간 800mm의 비가 내렸다. 2010년 12월 샌 개브리엘 산악지역에 600mm의 비를 뿌린 겨울폭풍도 ‘파인애플 익스프레스’ 덕으로 이로 인해 4년간 계속되던 가뭄이 해갈됐다. 2017년 5년간의 가뭄을 끝낸 폭우 역시 이 때문으로 풀이된다.

올 들어 최악의 겨울폭풍이 남가주를 강타하고 있다. LA 다운타운은 2인치, 산악 지역은 6인치가 넘는 비가 쏟아질 것으로 예상되며 지난번 산불이 난 일부 지역은 강제 대피령이 내려지기도 했다. 이번 폭우 또한 여러 차례 가주 가뭄을 해결해준 ‘파인애플 익스프레스’로 인한 것으로 분석된다.

‘대기의 강’은 강도에 따라 5등급으로 나눠지는데 이번에 찾아온 것은 최강보다 하나 약한 4등급이라 한다. LA 다운타운은 지난 10월 1일 이래 13.29인치의 강우량을 기록했는데 이는 평년의 153%에 해당하는 양이다. 올해는 물 걱정을 안 해도 될 것 같다.

2006년부터 2017년까지 가주는 2011년을 제외하고는 극심한 가뭄을 경험했다. 이런 장기간의 가뭄이 계속되자 전문가들은 지구온난화의 영향으로 가주 기후 패턴이 바뀌었다며 앞으로 100년 동안 건조한 날씨가 계속될 것이란 우울한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

그러다 작년과 올해 비가 많이 오자 이제는 지난 10여년간의 가뭄은 지구온난화와 관계가 없으며 강우량 변화는 자연스런 주기적 패턴의 일부라는 주장을 내놓고 있다. 하늘이 하는 일을 인간의 짧은 지식으로 재단하기는 어려운 모양이다.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