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무나 하는 대통령

2019-02-13 (수) 윤여춘 시애틀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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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대 대통령은 고단했다. 초대 대통령부터 임기 중 망명했다. 암살당한 사람, 자살한 사람(퇴임 후)도 있다. 네 명이 쇠고랑을 찼다 (그중 한명은 임기 중). ‘바지저고리’도 두 명 있다. 국가부도를 낸 사람, 북한에 돈을 퍼준 사람도 있다. 그래서 “아무나 대통령 하나”라는 쓴 소리가 나왔다. 대선 때마다 몰려나오는 ‘잠룡’들도 역시나 ‘아무나’에 가깝다.

정치 후진국인 한국은 그렇다 치고, 민주국가의 모델인 미국에서도 근래 똑같이 쓴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말할 것도 없이 정치문외한인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아무렇게나 식 국정운영 탓이다. 그가 대통령을 할 줄로 예상한 사람은 적었지만 어쨌든 유권자 직접투표에서 힐러리 클린턴에 300만표 뒤지고도 선거인단수에서 앞서 백악관 주인이 됐다.

호텔주인이자 쇼 진행자인 트럼프의 멋진 뒤집기 쇼를 보고 아무나 대통령이 될 수 있음을 간파한 사람이 있다. 커피숍 주인인 하워드 슐츠다. 그는 지난주 CBS-TV 대담프로 ‘60분’에 나와 “2020년 대선 출마를 진지하게 고려 중”이라고 밝혔다. 대수롭지 않은 그의 이 말은 “중도 무소속으로 나선다”는 대목 때문에 엄청나게 증폭돼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커피왕국 스타벅스를 일으킨 슐츠는 현역 CEO 시절부터 백악관 도전 의사를 내비쳤다. 트럼프 정책에도 비판적이었다. 문제는 그가 ‘평생 민주당원’이었다는 점이다. 민주당은 무소속후보 슐츠가 민주당 후보 표를 갉아먹어 트럼프의 재선을 돕고 거의 확실해진 민주당의 백악관 탈환을 막을 훼방꾼이라며 차라리 트럼프의 러닝메이트가 되라고 야유한다.

슐츠도 트럼프마냥 고분고분하지 않다. 그럴 사람이면 아예 출마하지 않는다. 그는 민주당과 공화당이 극한대결을 일삼고 국민복리보다 당리당략에만 몰두해 양당정치제도가 고장 난 상태라며 기득권 없는 제3당이 정비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슐츠는 진짜로 자수성가한 사업가다. 부모에게서 큰 유산을 물려받은 트럼프와 다르다. 뉴욕 브루클린의 빈민가에서 유대인 부모 사이에 태어난 그는 주방용품 세일즈맨이었던 28세 때(1982년) 시애틀에 출장 왔다가 커피원두 판매업소인 스타벅스로 직장을 옮겼고, 5년 후 빌 게이츠 부친 등 투자자들의 도움으로 5개 체인점포를 둔 스타벅스를 매입했다.

그는 산업박람회가 열린 밀라노(이탈리아)에 갔다가 무소부재의 에스프레소 커피숍들이 모두 북적대는 것을 보고 “바로 저거다”라며 쾌재를 불렀다. 집과 직장 외에 꼭 필요한 ‘제3의 장소’가 바로 커피숍이었다. 그 후 원두점포를 커피숍으로 개조한 슐츠는 CEO로 36년간 재임하며 스타벅스를 세계 77개국에 2만8,000여 매장을 둔 커피왕국으로 일으켰다.

슐츠는 트럼프보다는 선한 고용주다. 파트타임을 포함한 전 직원에 의료보험 혜택을 준다. 배우자들도 커버해준다. 역시 풀타임, 파트타임 구별 없이 스탁옵션 혜택을 준다. 미국 내 직원들의 임금은 남녀간, 인종 간에 차별이 없다.

슐츠는 트럼프와 달리 사과할 줄도 안다. 시애틀 프로농구팀 수퍼소닉스의 구단주였던 그는 2006년 팀을 외부 투자그룹에 매각했다. 팀이 오클라호마시티로 옮겨간 뒤 10여년간 ‘반역자’로 매도돼온 그는 엊그제 자신의 제2 고향이자 스타벅스 본사가 있는 시애틀에서 신간 홍보행사를 갖고 “시애틀 시민들에게 되돌릴 수 없는 실수를 저질렀다”며 사과했다.

슐츠는 트럼프보다 훌륭한 사업가지만 그 역시 정치 문외한이다. 억만장자들이 대개 그렇듯 그에게서도 나르시시즘(자기도취) 증세가 엿보인다. 국가경영이 사업경영과 매한가지라고 착각한다. 그게 아님을 트럼프가 증명했다. ‘슐츠 대통령’의 또 한 차례 시행착오가 겁난다. 그가 백악관 입성의 꿈을 접고 빌 게이츠처럼 여생을 자선사업에 정진했으면 좋겠다.

<윤여춘 시애틀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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