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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기술 접목한 ‘현대건축·산업디자인 산실’…설립 100주년 독일 바우하우스 박물관을 가다

2019-02-13 (수) 베를린-하은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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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성과 실용성 구현한 조형학교로 큰 족적

▶ 새 뮤지엄 개관·데사우 재단 소장전 등 축제

“예술은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교육을 통해 예술가를 만들 수 없다. 그러나 공예, 수공 기술은 교육이 가능하다. 그래서 학교는 공방에 기초를 두어야 한다. 각기 흩어져 있던 모든 미술 분야를 통합하고, 공예가와 화가 및 조각가들로 하여금 그들의 모든 기술을 결합시켜 협동 프로젝트를 수행하도록 훈련시키는 것을 학교의 목표로 한다”

올해 설립 100주년을 맞은 독일 바이마르의 전설적인 ‘바우하우스’(Bauhaus)가 내세운 미션이다. 딱 14년 운영으로 현대 산업디자인의 근간을 바꾼 교육기관이 바로 ‘바우하우스’다. 건축을 주축으로 예술과 기술을 종합하는 것을 교육 이념으로 삼았다. 철학은 ‘실용’이지만 예술적인 장인 육성을 지향했고 이후 기계적 대량생산을 위한 산업 디자인 운동으로 변화했다. 설립 100주년을 맞아 대대적인 문화예술, 그리고 건축 축제를 펼치고 있는 독일 베를린 바우하우스 박물관에 가봤다.

■바우하우스 설립자 발터 그로피우스


산업디자인과 현대건축은 ‘바우하우스’를 제외하고 논할 수 없다. 지금까지 바우하우스는 ‘모든 창조활동의 궁극적인 목표는 건축’이라는 모토를 기억하게 한다.

예술과 디자인의 역사에 명쾌한 획을 그은 바우하우스는 1919년 독일 바이마르에서 설립되어 1933년 나치에 의해 폐교되기까지 14년 간 강렬한 흔적을 남겼다. 바우(Bau)는 독일어로 ‘건축’을 뜻한다. 장인정신을 중시하는 독일에서 바우하우스는 조형학교였지만 명인(Meister)이 직공과 도제를 키워내는 공방으로 여겨졌다.

바우하우스의 설립자이자 초대교장인 발터 그로피우스(사진·Walter Gropius·1883-1969)는 베를린의 건축가 집안에서 자랐다. 뮌헨 공대와 베를린 샬로텐부르크 공대에서 건축을 공부했고 1907년부터 독일을 대표하는 가전업체 아에게(AEG)의 수석디자이너 페터 베렌스의 조수로 실력을 쌓았다. 그가 1912년 제작한 작품 ‘디젤 기관차’(1912)는 시대를 앞선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발터 그로피우스는 36세의 나이인 1919년 독일 바이마르에 바우하우스를 개교했다. 현대건축의 아이콘으로 여겨지는 ‘데사우의 바우하우스’(1925년~1932년 운영)를 직접 설계했다. 바우하우스의 철학을 보여주는 데사우의 디자인학교는 실제 현장에서 예술성이 구현되고 실용성을 입증하는 건축물이었다.

그로피우스의 예술적 성향은 1915년 베를린에서 천재작곡가 구스타브 말러의 미망인인 알마 쉰들러와 결혼했고 1920년 이혼한 개인사로도 짐작 가능하다. 그러나 1933년 나치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바우하우스는 독일로 이전했고 결국 폐교되었고 그로피우스는 영국을 거쳐 1937년 미국으로 망명했다. 이후 하버드대 디자인대학원 건축학 교수를 역임했고 1969년 보스턴에서 생을 마감했다.

■바우하우스 뮤지엄

바우하우스 데사우(Bauhaus Dessau) 재단은 100주년의 해를 맞아 베를린 바우하우스 아카이브 디자인 뮤지엄 재개관에 이어 바이마르와 데사우에 바우하우스 뮤지엄을 신축 개관한다.

베를린 바우하우스 아카이브 디자인 뮤지엄(Bauhaus-Archive)은1979년 건축가 한스 반델과 알렉스 스비야노빅이 재설계해 개관한 베를린 랜드마크이다. 현재 기존 건물은 보수 공사 중으로 2015년 건축가 볼커 스탑이 공모전에 우승해 글래스 뮤지엄 타워를 추가로 새 뮤지엄을 건축하고 있다.

바우하우스 뮤지엄 바이마르(Bauhaus-Museum-Weimar)는 오는 4월 바우하우스의 초기역사와 발전 및 유산을 보여주는 전시에 이어 오는 9월8일 바우하우스 데사우 재단이 소장하고 있는 4만9,000점의 컬렉션을 처음 공개한다.

<베를린-하은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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