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7월 30일, 일본군 위안부 연방하원 결의안 통과 5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장에서였다. 김복동 할머니와 퀸테로 글렌데일 시장 그리고 나는 “글렌데일에 소녀상을 꼭 세울 수 있게 해달라” “꼭 세워 주 가락을 걸었다. 그때 환하게 웃던 김복동 할머니의 모습을 그려본다.
나는 네 살 때 어머니와 사별했고, 할머니는 자녀가 없어서 그날 이후 ‘어머니’로 부르기는 했지만, 아들 노릇 제대로 못한 중죄인의 심정으로 그분의 명복을 빈다.
2013년 7월 30일, 바라고 바라던 소녀상을 글렌데일 중앙도서관 공원에 세우던 그날, 김복동 어머니는 예쁜 한복으로 차려 입고 소녀상을 어루만지며 감격해 하셨다. 어머니의 가냘픈 모습을 다시 대할 수 없다는 슬픔을 억누르며, 작가 김 숨의 ‘김복동, 길원옥 할머니 증언 소설’에 나온 그분의 아픔들을 떠올려본다.
전쟁이 끝나고 22살에 고향으로 돌아온 후 김복동 어머니는 너무 고통스러워서 23살 때 ‘전생록’을 가졌다는 할아버지를 찾아가 물었다.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런 고통을 받는 것인지, 이해할 길이 없었다고 했다. “전생에 지은 죄가 아니면 내가 겪은 일들을 …”
그의 물음에 아무도 답해 주지 않았다. 국가도, 사회도 침묵했다. 그분들이 평생에 걸쳐 혼자 묻고 혼자 답해온 것을 이제는 국가가, 사회가, 우리가 묻고 답해 주어야 한다는 취지로 작가는 증언소설을 썼다고 한다. 그러자면 우선 폭력의 역사 속에 묻혀있는 경험과 기억을 되살려 내야했다.
김복동의 나이 14살이던 어느 날 동내 구장과 반장이 누런 옷을 입은 일본 사람을 데리고 찾아왔다. 딸을 내 놓으라는 그들의 말에 엄마는 끝까지 거절할 수가 없었다. 거절하면 배급이 끊기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윽박질렀다. “반역자가 되고 싶어요? 딸을 내놓지 않으면 고향에서 못살 줄 알아요.”
그래서 “내가 가겠다고 했어, 군복 만드는 공장이라는데, 죽기야 할까 싶었어”라고 할머니는 회고했다. 김 할머니의 이야기는 이어진다.
“말레이지아에 있을 때는 산 너머 군부대로 출장을 가기도 했어. 군인들이 천막으로 임시 위안소를 만들고 우리를 기다렸어. 합판으로 짠 관 같은 곳에 들어가 군인을 받았어, 개구리처럼 두 다리를 오그리고 군인을 받았어, 아침부터 저녁까지, 군인들이 천막을 들추고 소리치고는 했어, 빨리 빨리! 저녁이 되면 두 다리가 콘크리트 기둥처럼 굳어서 펴지지가 않았어.”
고향에 돌아와 처음 엄마에게 말했을 때 엄마는 믿지 않더라고 했다. 그런 일을 겪고는 사람이 살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 일, 내가 겪은 일. 나는 알아. 내가 겪은 일을 잊은 적 없어.”
이후 김 할머니가 위안부 피해자 등록을 하며 자신을 찾으려고 하자 큰 언니가 말렸다. 조카들 생각해서라도 제발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
“그래도 나를 찾고 싶었어, 66살에 나를 찾으려고 신고했어. 신고하고 나니 큰 언니가 발을 끊었어, 우리 아버지, 엄마 제사 지내주는 조카들까지…”
며칠씩 같이 지내면서도 감히 어머니의 지난날들을 여쭐 수 없었다. 그분이 한탄하듯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가 너무 아프고 슬퍼서 더 이상 물어볼 수가 없었다.
“아무도 미워하고 싶지 않아, 아무도 원망하고 싶지 않아, 용서하고 떠나고 싶어. 한 엄마에게서 태어난 형제도 나를 이해 못 하는데 누가 나를 이해하겠어?”
우리들에게 늘 미안해하며 용기와 격려를 주시던 그분의 목소리가 떠오르며 가슴이 메어진다. 이분들의 증언은 아직도 우리 모두의 마음에 다가서지는 못 하는 것 같다.
김복동 어머니가 하늘나라에서라도 정말 행복하시기만을 간절히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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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원 전 가주한미 포럼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