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고삐 풀린 처방약값

2019-01-24 (목)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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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 제약회사들이 새해 들어 처방약값을 일제히 올리면서 서민 환자들의 부담이 더욱 커지고 있다. 노바티스, 베이어 등 30여개의 제약회사들은 각 사별로 수십 개에 달하는 의약품 가격을 5~10% 인상했거나 곧 인상할 계획으로 있다. 트럼프 행정부 압력에 일시적으로 약값 인상을 자제하는 듯 했던 제약회사들이 새해 들어 또 다시 가격인상에 나선 것이다.

“고삐가 풀렸다”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 처방약값의 상승은 규제의 부재가 초래한 필연적인 ‘미국병’이라 할 수 있다. 미국은 주요 선진국들 가운데 정부가 제약회사의 가격결정에 거의 간섭하지 않는 유일한 국가이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이것이 미국의 현실이다.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치솟는 처방약값의 선두에는 ‘특수 처방약’(specialty drug)들이 있다. 혈우병 치료제들의 경우 연간 약값은 무려 58만 달러에서 80만 달러에 달한다. 노바티스사의 비호지킨스 림프종 치료제의 연간 비용은 47만5,000달러가 넘는다. 1년 치 처방약값이 집 한 채 값이라니 보통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들다.


하지만 처방약값 상승과 관련한 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유통구조에 있다. 그 한가운데 존재하는 게 PBM(pharmacy benefit manager)들이다. PBM은 병원, 제약사, 보험회사, 약국들 간의 연결고리로 자금결제, 기록관리, 보고 등의 행정처리를 담당한다.

그런데 2006년 처방약이 메디케어에 포함되면서 방대한 숫자의 환자들이 처방약 시장에 들어오게 된다. 그러면서 PBM들의 역할도 확대된다. 어떤 환자들이 처방약 혜택을 받을 수 있는지 보험사들을 위해 플랜을 짜주고 제약회사들과는 가격협상을 벌일 수 있게 된 것이다.

겉으로 보면 바람직한 시스템이다. 보험회사들은 PBM들이 제약회사로부터 받은 할인폭에 따라 보수를 지급한다. PBM들로서는 가격을 더욱 인하시켜야할 인센티브가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런데 여기에 기만이 끼어들 소지가 있다. 제약회사들로서는 가격을 마구 올려놓은 후 큰 폭의 할인을 해주는 것처럼 생색을 낼 수 있는 것이다. 할인을 많이 받아야 보수가 늘어나는 PBM들에게도 유혹적이다. 마치 백화점에서 가격을 올린 후 대폭 할인세일을 하는 것과 유사한 방식이다.

2006년부터 2014년 사이 처방약값이 평균 57% 상승한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제네릭이 없는 처방약들의 경우에는 무려 142% 폭등했다. 처방약값 폭등은 디덕터블이 높은 환자들에게는 직격탄이다. 보험사들이 환자들에게 코인슈어런스를 요구하는데 따른 부담도 적지 않다.

이처럼 고삐 풀린 처방약값은 미국의 의료시스템을 크게 위협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지난주 연방하원 민주당 의원들이 제약업계의 처방약값을 조사하겠다고 나선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연방하원 감독 및 개혁위원회의 엘리야 커밍스 위원장(민, 매릴랜드)은 12개 제약회사 앞으로 브랜드네임 처방약의 가격결정 방식, 그리고 수익 사용처에 관한 정보와 문서들을 제출해 달라는 서한을 보냈다고 밝혔다.

현재 하원에는 커밍스 위원장 등 민주당 의원들이 발의한 처방약값 규제 법안들이 여러 건 상정돼 있다. 하원권력을 차지한 민주당이 처방약값의 고삐를 잡기위해 적극 나서고 있는 것은 일단 고무적이다. 아무쪼록 이런 움직임이 정치적 제스처에 그치지 않고 서민 환자들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덜어주는 실질적인 성과로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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