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민주당 ‘후보풍년’의 득실

2019-01-23 (수)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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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대선을 앞두고 민주당의 경선판이 자천 타천 후보들로 넘쳐나고 있다. 몇몇 정치인은 이미 출마를 공식 선언했으며 많은 민주당 인사들이 출마여부를 저울질하고 있다. 전례 없이 이른 시기에 경선이 달아오르고 있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21일 캘리포니아 검찰총장 출신인 카말라 해리스 연방 상원의원이 출마를 선언했다.

출마 선언자들 가운데는 중량급 정치인도 있지만 유권자들에게 이름이 낯선 인물들도 다수이다. 조 바이든 전 부통령과 지난 대선에 나섰던 버니 샌더스 의원 같은 헤비급 후보들은 머잖아 출마를 공식선언할 것으로 예상된다. 직간접적으로 출마의사를 밝혔거나 출마가 점쳐지는 민주당 인사는 30명에 육박하고 있다.

민주당 후보군은 수적으로 넘칠 뿐만 아니라 연령과 성별, 그리고 배경 또한 다양하다. 민주당의 ‘후보풍년’을 스웨덴식 뷔페인 ‘스모르가스보드’에 비유하는 정치평론가도 있다. 풍성하기는 한데 무엇을 집어 들어야 할지 선뜻 결정하기가 쉽지 않다. 누군가를 골라야 하는 민주당 유권자들로서는 적지 않게 고민이 될 만하다.


왜 이처럼 난립에 가까울 정도로 많은 민주당 후보들이 경선에 나서고 있는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트럼프 때문이다. 트럼프의 지난 2년은 미국의 정치를 다시 바로 세워야 한다는 자각과 위기감을 확산시켰다. 하지만 민주당의 수많은 인사들을 경선으로 끌어들이고 있는 보다 현실적인 요인은 트럼프의 형편없는 인기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그의 국정지지율은 37%에 머물렀다. 반대 여론은 57%에 달했다. 트럼프가 현직이긴 하지만 충분히 꺾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민주당 내에 팽배해 있다.

하지만 넘쳐나는 후보들과 이들이 벌이게 될 치열한 경선이 민주당에 플러스가 될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한다. 너무 많은 선택이 주어지는 게 꼭 좋은 일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마켓에 6개의 잼을 진열했을 때보다 24개 제품을 진열했을 때 소비자들의 제품 구입비율이 훨씬 낮았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후보난립은 자칫 유권자들의 결정유예나 포기로 이어질 수 있다.

또 후보들이 너무 많다보면 개개인의 장단점과 정치적 입장을 세세히 헤아리기가 어렵다. 별 의미가 없는 도토리 키 재기식의 초기 여론조사들 속에서 잠재력 있는 무명후보들은 자신을 드러낼 변변한 기회조차 갖지 못한 채 사라질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되면 결국 지명도 싸움이 돼 유권자들에게 익숙한, 그러나 내용은 진부한 ‘그 밥에 그 나물’ 후보들로 좁혀지게 된다.

분명 트럼프에 대한 국민들의 실망감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그러나 다음 대선까지는 아직 20개월이나 남아있다. 정치에서 20개월은 어떤 변화도 일어날 수 있는 거의 ‘영겁의 시간’이라 할 수 있다.

1992년 대선을 상기해보자. 당시는 지금과 정반대의 상황이었다. 1991년 걸프전에서 승리를 거둔 조지 H.W. 부시의 지지율은 하늘을 찌를 듯 했다. 한마디로 그는 난공불락으로 보였다. 부시의 손쉬운 재선이 점쳐지는 분위기에 눌린 듯 1991년 8월까지 대선출마를 선언한 민주당 인사는 매서추세츠 연방상원의원 폴 송가스 단 한사람뿐이었다. 민주당은 부시에 완전히 눌려 있었다.

우리는 1992년 대선에서 무명의 아칸소 주지사 빌 클린턴이 부시를 누르고 승리한 것을 알고 있다. 만약 당시에 지금처럼 민주당 후보들이 난립했더라면 과연 클린턴이 자신을 어필할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클린턴이 기회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다른 민주당 인사들이 승산이 없다며 경선에서 발을 뺀 덕이었다. 이렇듯 역사는 무수한 인간들의 개별적 계산과 우연, 그리고 행운 등 여러 요소들이 상호작용을 하면서 예측을 완전 비켜가는 방향으로 전개되곤 한다.

민주당 후보들은 같은 명패를 내걸고 있지만 이념적 스펙트럼은 사회주의 성향에서부터 중도에 이르기까지 폭이 상당히 넓다. 너무 많은 후보들 때문에 집중력이 분산되고 자칫 후보들 간에 격렬한 경쟁이 지속된다면 본선에 필요한 동력을 확보하는 데 애를 먹을 수 있다.

아무리 트럼프의 인기가 바닥으로 떨어졌다지만 대선에서 1대 1 구도가 되면 양당 지지자들이 결집하면서 결국은 51대 49의 승부가 된다. 후보난립이 승리에 대한 자신감이 투영된 현상이라면 민주당은 이를 경계해야 한다. 박빙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후보를 가려내야 하는 어려운 숙제가 민주당 유권자들 어깨에 지워진 셈이다.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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