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14%P의 의미

2019-01-09 (수) 조윤성 논설위원
작게 크게
집권 3년차에 들어가는 문재인 정부의 국정 지지율이 크게 흔들리고 있다. 경제는 갈수록 어려워지고 남북관계는 답보상태인데다 한반도 비핵화마저 기대만큼의 빠른 진전을 보이지 않으면서 국민들의 기대는 점차 실망으로 바뀌고 있다. 지난해 중반 한때 80%대를 넘나들던 국정 지지율은 50% 아래로 곤두박질친 후 별 반등의 기미가 없다. 상황이 더 악화되면 지지율이 30%대까지 추락할 수 있다는 우려 섞인 전망까지 나온다.

대부분의 정치전문가들은 국정의 동력을 유지할 수 있는 지지율의 마지노선을 40%로 본다. 더 밑으로 떨어질 경우 문재인 정부의 개혁 드라이브는 물 건너 갈 가능성이 높다. 누구보다 민심에 촉각을 세우는 집단은 국회의원들이다. 정부에 대한 지지율이 곤두박질치면 여당의원들까지 등을 돌리는 현상이 나타나게 되고 대통령은 고립무원의 처지가 된다. 자칫 ‘식물정권’이 될 수도 있다.

민주국가의 대통령 지지율 추이를 살펴보면 취임 초에는 크게 올랐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떨어지는 현상이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지지율의 하락은 필연적이다. ‘노란 조끼’ 시위로 정치적 위기에 처해있는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의 취임 초 지지율은 문 대통령 초기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현재 지지율은 30%에 겨우 턱걸이하고 있는 실정이다.


‘외모천재’로 폭발적 인기를 얻었던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의 지지율 역시 초기 63%에서 35%로 급락한 상태다. 국민들의 기대치가 너무 높다보면, 성과가 그 기대에 미치지 못할 경우 하락 속도와 폭은 더 빨라지고 더 커진다.

지난 주 여론조사에서 문재인 정부 국정 지지율은 46%로 나타났다. 최근 지지율은 45% 내외에서 보합세를 유지하고 있는 형국이다. 문재인 정부는 지금 교차점에 놓여있다고 볼 수 있다. 좀 더 치고 올라간다면 국정 동력을 회복하겠지만 더 떨어질 경우에는 자칫 개혁의 엔진 자체가 멈춰 설 수도 있다. 최근 수구세력의 무차별 공격이 한층 더 거세지고 있는 것은 이런 상황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론조사에서 나타나는 한 가지 특기할만한 사실은 문 대통령 개인에 대한 지지율이 국정 지지율을 훨씬 상회하고 있다는 점이다. 60%의 응답자가 대통령 개인에 대한 지지를 드러냈다. 대통령 개인 지지율과 국정 지지율 사이에는 14%P의 차이가 있다. 대통령에게 호감은 갖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하는 일과 그 결과를 무턱대고 지지하지는 않겠다는 국민들이다. 그런 점에서 무조건적으로 문 대통령을 지지하는 ‘극성 팬덤’과는 구별된다.

여론조사에서 확인된 14%P의 존재는 상당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양극화 정치의 무수한 문제점들이 맹목적인 정치적 팬덤에 의해 만들어지고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좋아한다고 해서 그 정치인, 그 지도자가 하는 모든 말과 행위가 정당화되고 지지의 대상이 되는 건 아니라는 경계의 태도는 성숙함의 한 징표라 할 수 있다. 이런 국민이 많아질수록 지도자는 더욱 긴장하고 노력하게 되는 것이다.

2017년 문재인 정부가 출범할 당시 “국정은 의도가 아니라 결과로 말하는 정치행위인 만큼 ‘선량한 무능’은 안 된다”는 내용의 칼럼을 썼다. 대통령은 좋아하지만 성과에는 만족하지 않는다는 14% 국민들은 문재인 정부의 ‘선량한 무능’에 실망하고 있는 것이라 풀이할 수 있다. 문재인 정부의 개혁동력 회복 여부는 대통령에 대한 신뢰와 기대를 아직은 저버리지 않고 있는 이런 국민들의 마음을 어떻게 되돌려 놓느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민들의 인내와 양해만을 구할 시점은 지났다. 이제는 성과로 답해야 할 때다. 새로이 청와대 참모진을 개편했으니 심기일전해 남은 40개월 동안 무엇보다 폐쇄적 인식에서 벗어나 두루 들으며 두루 인재를 쓰는 열린 정치를 펴야 할 것이다. 점차 나아지고 있다는 것을 국민들에게 눈으로, 또 피부로 확인시켜줘야 한다.

문재인 정부가 실패할 경우 그것은 한 대통령, 한 정권의 실패로만 끝나지 않을 것이다. 또 한 번 역사의 퇴행을 부를 것이 너무나도 자명하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이 지지율 하락을 마크롱이나 트뤼도와는 다른 차원의 절박함과 엄중함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다.

<조윤성 논설위원>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