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튜닝

2019-01-05 (토) 고명선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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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차림이 끝나기도 전에 대문 밀고 들어서는 손님 맞듯 얼떨결에 내민 손에 황금돼지해가 안겼다. 어제나 오늘이 별반 다름없는데 멈출 줄 모르는 시간은 늘 새로움을 예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운다. 시작의 설렘과 조바심의 무게가 어깨를 짓누른다. 가보지 않은 미래가 기대도 되지만 쉽지도 않을 것이라는 예견을 지금까지 살아온 날만큼의 경험이 갖게 해준다.

오케스트라 연주회 때 악기 간의 음이 안 맞으면 아름다운 하모니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연주 시작 전에 바이올린을 들고 나온 악장이 튜닝한 다음, 악장이 들려주는 ‘라’음을 들으며 모든 악기의 연주자는 튜닝 하는 시간을 갖는다. 긴 곡을 연주할 때는 악장과 악장 사이에 튜닝 하는 경우도 있다. 현악기는 혼자서도 튜닝할 수 있지만, 해머가 줄을 두드려야 소리를 얻을 수 있는 피아노는 전문 조율사에게 맡겨야 한다. 관악기의 경우 튜닝이 잘 못 되면 악기를 새로 장만하거나 부품을 교체해야 한다. 그러고 보니 모든 악기의 튜닝은 제각각의 특성에 맞게 이루어지는 필수적인 일이다.

내 삶에 불협화음을 내지 않으려면 무슨 일이든 시작하기 전에 자신을 튜닝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내 몸도 소리를 내는 악기나 다름없다. 기쁠 때 나오는 소리와 기분이 가라앉았을 때 나오는 소리가 다르고 배고플 때와 그렇지 않을 때 소리의 높낮이가 다르다. 몸이 지치고 힘들 때는 먹먹해지기까지 한다.


혼자 힘으로 튜닝이 안 될 때는 병원의 도움을 구해서라도 모든 기능을 제자리로 돌려놓아야 한다. 악기와도 같은 우리 몸을 단련하기 위해 운동을 하고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감정을 다스린다. 인생의 깊이를 알고 영혼을 구제받기 위해 좋은 책을 골라 읽고 신앙을 갖기도 한다. 묵상과 여행 등 자신만의 특별한 방법을 동원해가며 사는 동안 튜닝을 이어간다. 중요한 것은 처음 시작할 때 튜닝이 잘못 되면 의도된 연주를 할 수 없다는 데에 있다.

용두사미가 될지언정 밑그림을 크게 그리라는 말이 있다. 나와 가까이 지내는 어른은 비록 고양이를 잡을지라도 호랑이 잡을 준비를 해야 한다고 자주 말씀하신다. 무슨 일을 하기에 앞서 철저한 준비를 하라는 가르침으로 새겨듣고 있다.

잉크 냄새가 시큼한 새 달력이 여기저기서 배달되었다. 조금은 낯설지만 곧 익숙해질 것이다. 지금까지 그려온 그림 위에 덧칠하듯이 내가 잡은 붓끝이 나를 그려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림의 빛깔이 고왔으면 좋겠다. 흐른 시간만큼 향기 묻어나는 아름다운 그림을 완성하고 싶은 것이 나만의 심정은 아닐 것이다.

정신상담가인 동네 친구 모니카는 새해를 맞아 혼자서 바닷가를 거닐고 왔다. 인적 없는 곳에 들러 한 발짝 두 발짝 모래 위를 걸으며 그녀가 무슨 스케치를 했는지 물어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녀의 두툼한 털 코트에 묻힌 얼굴은 금방 튜닝을 마친 빛나는 악기 같았다. 한 해를 잘 달려가기 위해서 겉과 속을 조심스럽게 튜닝 해야 할 황금빛 새해가 밝았다.

<고명선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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