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이만하면 되었다”

2018-12-28 (금) 권정희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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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해의 끝이다. 2018년이라는 이름의 전차는 더 이상 나아갈 곳이 없다. 365일 열두 달을 달려온 지금 우리는 어디에 서있는가. 이곳은 연초에 목표로 삼았던 그곳인가, 아니면 생각지도 못한 엉뚱한 곳인가. 끝에 서서 지나온 한해를 돌아보는 시점이다.

‘끝’이 의학계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생-로-병(生老病)’에 관심을 집중했던 의학계가 ‘사(死)’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생의 마지막에 대한 관심이다. 생명연장 치료로 환자의 마지막 날들이 무작정 길어지고 있는 현상과 상관이 있다.

의사의 의무는 환자를 고쳐서 오래 살아있게 해주는 것이라고 보던 데서 환자가 품위를 유지하며 편안하게 마지막을 보내도록 도와주는 것으로 인식이 바뀌고 있다. 생명연장 대신 환자의 웰빙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의사는 말기환자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라고 이 분야 전문가인 아툴 가완디 박사는 권한다.


“미래에 대해 어떤 두려움과 걱정이 있는가, 남은 날들 동안 가장 하고 싶은 일들은 무엇인가, 희생할 수 있는 것과 절대로 희생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 ‘아주 좋은 날이다’ 싶은 날은 어떤 날인가.”

생의 벼랑 끝에 서있어서 일초도 낭비할 시간이 없으니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만을 챙긴다는 자세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환자가 마지막까지 좋은 삶을 살다 가게 해주는 것이 목표이다.

그렇다면 남은 날들이 아직 많은 건강한 때에 이 질문들을 미리 던져보면 어떨까. 자신이 생각하기에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 가장 하고 싶은 것들, 절대로 희생할 수 없는 가치들을 중심으로 살아간다면, 그래서 ‘아주 좋은 날’이 많아진다면 그게 바로 좋은 삶이 아닐까.

10세기 스페인을 황금기로 이끌었던 군주는 아브드 알 라흐만 3세였다. 이슬람 왕조인 후 우마이야 왕조의 세 번째 군주로서 이베리아 반도 전역을 통일하면서 스스로를 칼리프(정치 종교 최고 지배자)로 칭했다. 완벽하게 호화로운 삶을 살았던 그가 말년에 이런 말을 했다.

“50년이 넘게 통치하면서 나는 백성들로부터 사랑을 받았고, 적들은 두려움에 떨었으며, 동맹국들의 존경을 받았다. 부와 명예, 권력과 쾌락은 손짓만 하면 달려왔다.”

하지만 그럼에도 인생은 행복하지 않았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

“내가 순수하게 진짜 행복했던 날들을 꼼꼼하게 세어보았다. 모두 합치니 14일이었다.”


그는 왜 행복하지 않았을까. 그가 인생에서 무엇을 추구했느냐와 상관이 있다. 삶에서 추구하는 것, 즉 욕망이 인생의 내용을 결정하고, 그것이 무엇이냐가 행복을 결정한다,

한마디로 내적인 가치를 추구하느냐 외적인 성취를 추구하느냐이다. 가족, 사랑, 친구, 신앙 등 우리의 내면을 풍요롭게 하는 것들 즉 ‘존재’에 우선적 가치를 두느냐, 명예, 돈, 권력 등 ‘소유’를 최고의 목표로 삼느냐이다. 전자가 마시는 만큼 갈증이 해소되는 물이라면 후자는 마실수록 갈증이 심해지는 인공음료이다.

‘술의 역설’이라는 게 있다. 알콜 중독자가 술을 마시는 것은 현실의 고통을 잊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술을 마시다보면 중독이 되어서 나중에는 안 마시고는 살 수가 없게 된다. 술기운에 잊으려던 고통이나 슬픔에서 영영 헤어나지 못하게 발목을 잡는 것이 결국 술이 되고 만다. 술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같은 원리가 부나 명성 혹은 권력에도 적용된다. 욕망은 성취의 필수조건이지만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는 멈출 줄을 모른다. 가질수록 더 갖고 싶어진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탐-애착-집착의 무한 반복 사이클이다. 번뇌로 마음이 평안할 날이 없다.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한 게 대단한 행운일 수 있다”는 달라이 라마의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생의 끝에 서면 관심은 ‘존재’로 향한다. 평생 쫓던 모든 ‘소유’는 부질없어진다. 말기환자들이 우선적으로 하고 싶어 하는 일은 용서하고 용서 받는 일. 관계가 틀어진 부모형제나 자녀와 화해하며 말할 수 없는 기쁨을 얻는다. 그리고 ‘아주 좋은 날’은 사랑하는 가족들과 오순도순 밥 먹으며 웃음꽃 피는 저녁이거나 오랜 친구와 이야기 나누는 평화로운 오후. 갈라파고스나 남극 등 ‘죽기 전에 가봐야 할 곳’ 목록에 오른 거창한 여행지의 하루가 아니다.

2018년의 끝, 아쉬움이 남는다. 희망하던 것들은 손에 잡히지 않고, 그날 분의 실망, 그날 분의 아픔, 그날 분의 슬픔은 꼬박꼬박 찾아든다.

하지만 생의 끝에 미리 서서 바라보면 우리는 가져야 할 것들을 이미 가지고 있다. ‘5F’ - 행복한 삶을 이루는 요소들이다. 가족(Family), 신앙(Faith), 친구(Friend), 음식(Food) 그리고 재미(Fun)이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자주 어울려 함께 먹으며 재미있게 지낸다면, 우리의 삶, 이만하면 되지 않았는가. 이만하면 되었다. 자족만한 행복의 보증수표는 없다.

<권정희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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