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알프스 산 배경으로 한 풍광 뛰어난 ‘소금 성’

2018-12-14 (금) 방인숙/ 수필가
크게 작게

▶ 수필가 방인숙의 동유럽 여행기 ④ 짤츠부르크

알프스 산 배경으로 한 풍광 뛰어난  ‘소금 성’

미라벨 정원

독일에서 오스트리아까지 국경도 검문도 없어 기분 묘해
바다 융기된 알프스 산$인근 소금 광산으로 사람들 몰려들어 산업 발전
언덕위 거대한 암반위 지은 요새 짤츠부르크 성은 60채 집 허물고 지어
미라벨 정원은 볼프디트리히 대주교가 애인살로메를 위해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

뮌헨 다음 행선지는 영세중립국인 오스트리아의 짤츠부르크다. 소금을 뜻하는 짤츠와 성을 뜻하는 부르크니 '소금 성'에 가는 셈이다. 인구 약 150만 명의 유럽서부 작은 도시지만, 9년 연속 살기 좋은 도시 1위로 뽑히기도 했었다. 미풍에 흔들리는 벼 같은 청 보리들판에, 오스트리아가 가까워오는지 알프스 산들이 배경으로 등장, 풍광이 더 멋져졌다. 땅이 비옥한지 소나무들이 뒤틀리지 않고 곧고 가늘고 키가 크다.

가는 길이 영화 ‘Sound of Music’의 촬영지라 영화를 봤다. 대사들이 서정적 여운이 짙어 여전히 아름답고 감명 깊다. 일테면 수녀들이 늘 기도시간에 늦는 마리아를 혼내라고 원장에게 종용하자, 원장은 “말썽 부리는 양이라도 털은 따뜻하다”며 감싼다. 그럼 마리아에게 방울이라도 달아놓기를 촉구하자, 원장은 “모래위의 파도를 어찌 잠재울까요. 저 달빛을 어떻게 손 안에 넣을 수 있겠는가”라는 노래로 답한다. 얼마나 함축성 있는 시어들인가.


영화가 끝나니 이미 오스트리아(고대 독일어로 ‘동쪽의 영토’란 뜻의 단어가 라틴화한 것)란다. 국경도 검문도 아무런 징후나 제지도 없었기에 기분이 묘하다. 새삼 조국의 뼈아픈 현실이 상기돼 가슴이 저려온다. 면적은 남한보다 약간 적고, 옛날엔 독일과 한 영토였기에 독어를 사용한다. 호헤 타우렌 산맥을 낀 알프스 동부 고산지대로 동계올림픽을 두 번 개최했던 설국이다. 보통 알프스하면 프랑스를 우선 떠올린다. 실은 국토의 3분의 2나 알프스산지인 오스트리아가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한다. 바다 없는 내륙국인 대신 호수가 많다.

특히나 알프스산 아래 위치한 짤츠부르크는, 북쪽의 로마라 일컬을 만큼 중세건물이 많다. 태초엔 알프스도 바다였다가 융기됐던 터라, 인근의 소금광산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통행료가 다른 지역보다 싸니까 소금무역이 왕성해져, 많은 유동인구로 부유도시성장발판이 됐다. 첫인상은 역시 아기자기하고 고풍스럽다. ‘어머! 여기 동화나라가 또 있네!’했다.

구시가 남쪽에 이곳 상징인 최고의 고성 짤츠부르크 성채가 어느 지점에서도 눈에 띄게 우뚝 서있다. 1077년 대주교가 유사시의 공격에 대비키 위해 언덕 위 거대한 암반에 지은 요새다. 성을 짓느라 60채의 집을 철거했다니 성의 규모가 가늠된다. 조금 걸어 올라가 성 밑에서 트램을 탔는데 급경사라 거의 수직상승이다.

성채의 넓은 정원엔 꽃들의 천국인데 족두리꽃(풍접초)도 있어 반갑다. 보리수가 많다했더니 슈베르트가 가곡 ‘보리수’를 여기서 영감을 얻어 작곡 했단다. 900년 역사를 간직한 고성을 삥 둘러싼 성벽은 이른바 파노라마전망대다. 빼어난 전경에 넋을 앗길 정도다. 멀리 알프스산을 배경으로 순하게 흐르는 찰자흐강과 다리, 벽돌색 지붕의 아기자기한 집들이 연출하는 풍광이 완전 매력이다. 성 밑 숲속에 싸인 집들도 하나같이 명품산장이다. ‘사운드 오브 뮤직’의 도입부에 마리아가 노래하는 장면에서다. “산들이 오라 손짓하는 바람에, 향기로운 향기에, 구름 위로 올라가듯 한다.”고. 정말 이런 노래가 나올 밖에 없는 정경이다.

성안으로 들어가니 당시의 대포도, 우물도, 그 자리에 그대로다. 황금홀엔 1500년 전에 만든 난로가 여태껏 있고, 하이든과 모차르트가 사용했던 수궁 식 파이프오르간도 있다. 이런 아름다운 성이 2차 대전 이후엔 나치전범들의 감옥이기도 했다니 모순이다.
카피텔 광장의 베드로성당은 앞에 예수님과 바울 등 네 명의 동상이 있어 로마의 베드로성당과 비유된다. 이곳이 유명한 이유는 모차르트가 세례를 받고, 그의 누이와 교향곡의 아버지 하이든이 묻혀있는 것. 안에 들어가니 과연 웅장하고 경건해 절로 숙연해진다.

성당의 뒤쪽이 바로 ‘사운드 오브 뮤직’의 마지막에 트랩대령과 마리아가 애들을 데리고 숨어있던 곳이다. 철문과 안에 키 큰 비석들이 즐비한 게 영화장면과 똑같다. 당연한 일인데도 기시감이 든다. 앞에 묘지들은 작은 비석과 예쁜 꽃단장으로 묘지가 아닌 화단 같다.

어느 웅장한 저택 앞이다. 비공개라 철문 안을 기웃하니 지휘하는 모습의 큰 동상이 있다. 바로 20세기 세계적인 명지휘자 폰 카라얀이 태어나고 살던 집이고 그의 동상이었다. 그가 고향이 같은 모차르트를 칭송했던 말이 떠오른다. “세계에 위대한 음악가는 많지만 모차르트는 단 한 사람이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보게 마련이라더니...


옆에 있는 미라벨(라틴어로 ‘아름다운 곳’)정원으로 갔다. 1690년 볼프 디트리히 대주교가 애인 살로메를 위해 지은 바로크양식의 궁과 정원이다. 주교가 파문당한 후론 시민공원과 박물관으로 개방하고 있다. 궁전 안의 홀인 ‘대리석의 방’은 모차르트가 주교를 위해 연주하던 곳인데, 현재는 실내악콘서트홀로 사용하고 있다. 일렬로 서있는 보리수들이 위에만 초록덩이들이 군데군데 달려있는 독특한 형세라 부자연스럽다. 정원 안 그리스신화 영웅들의 대리석상 높이와 맞게끔 일정하게 조율해서란다. 커다란 연못과 분수, 가화요초들의 화단도 빼어나다. 유럽정원의 최고작이라는 살로메의 조각상을 보니 아름답기는 하다.

영화 속의 ‘도레미 송’은 호엔성의 성벽계단에서 시작해 이 정원계단에서 끝난다. 진짜 영화음악이 계속 흘러나오니까, 어디선가 마리아와 애들이 불쑥 불쑥 튀어나오는 환영이 어른거린다. 애석하게도 아역배우였던 큰딸, 막내딸, 남자애들이 이미 세상을 하직했다던가. 영화장면의 계단, 철문, 모든 게 다 그대로인 현장이라 더 허망하다. 출구로 나오니 옆면에 영화장면이 새겨진 영화투어미니버스들이 죽 늘어서있다. 영화촬영지가 이곳 신시가지에 4개소, 구시가지에 11군데나 된다니까. 관광객들이 원래 모차르트 때문에 이곳을 찾았는데, 이 영화로 관광절정을 이뤘단다. 이 도시는 모차르트와 사운드 오브 뮤직영화가 먹여 살린다던 말이 실감난다. 문화예술의 힘은 이리 막강하다.

알프스산지에 싸인 한복판, 강이라기엔 좀 뭐한 찰자흐강이 흐른다. 그 강을 사이로 신, 구시가로 구분된다. 수백 년에 걸쳐 형성된 상업중심지인 구시가로 가려고 건너는 다리 난간에 자물쇠들이 가득이다. ‘다리가 얼마나 무겁고 힘들까!’ 실제 붕괴위험으로 정기철거를 한단다. 소설가 김영하씨가 말했다. “우리는 불완전한 사랑을 극복하기 위해 단단하고 완전해 보이는 바위나 자물쇠에 사랑을 남기는 것”이라고. 수긍 가는 지적이다. 세월의 불가항력에 사랑이 부서질 확률이 더 높으니까. 사랑맹세의 자물쇠들이 낭만보단 허무인 이유다.

게트라이트 길은 좁은 골목이지만 이른바 구시가의 명동이다. 프랑스의 모리악은 “게르만주의와 라틴주의가 황홀하게 만나는 길”이라고 표현했다. 독일처럼 문맹자들을 위해 건물 밖에 수직으로 걸린 수공예간판들이 예술이다. 구둣가게인지 주조물원 안에 구두가 대롱대롱 달려있어 웃음이 난다.

건물들도 다 예쁜데 어느 한 집이 유난히 색깔이 확 튄다. 노랑과 살색을 섞은 것쯤 될까. 당시 마리아 테레지아 제후의 기호색이라 마리아 테레지아 칼라라 칭한다는 그 색이다. 모차르트가 태어나 17세까지 살았다는 생가였다. 국경일도 관공서도 아닌데 오스트리아 국기가 걸려있다. 알고 보니 어느 건물이든 국기가 걸려있으면 중요인물과 연관되거나 역사적 가치가 있다는 표시고, 국기의 크기는 중요도의 척도란다. 그런데 거의 4층 건물의 키만큼 기다란 국기이니 모차르트가 얼마나 사랑받고 있는지 알겠다. 1층은 그가 사용했던 피아노와 바이올린, 악보원본이 있고, 2층엔 오페라와 관련된 자료들, 3,4층은 가족들의 생활공간을 그대로 재현해 놓았단다.
독일에서 오스트리아까지 국경도 검문도 없어 기분 묘해
바다 융기된 알프스 산$인근 소금 광산으로 사람들 몰려들어 산업 발전
언덕위 거대한 암반위 지은 요새 짤츠부르크 성은 60채 집 허물고 지어
미라벨 정원은 볼프디트리히 대주교가 애인살로메를 위해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

뮌헨 다음 행선지는 영세중립국인 오스트리아의 짤츠부르크다. 소금을 뜻하는 짤츠와 성을 뜻하는 부르크니 '소금 성'에 가는 셈이다. 인구 약 150만 명의 유럽서부 작은 도시지만, 9년 연속 살기 좋은 도시 1위로 뽑히기도 했었다. 미풍에 흔들리는 벼 같은 청 보리들판에, 오스트리아가 가까워오는지 알프스 산들이 배경으로 등장, 풍광이 더 멋져졌다. 땅이 비옥한지 소나무들이 뒤틀리지 않고 곧고 가늘고 키가 크다.

가는 길이 영화 ‘Sound of Music’의 촬영지라 영화를 봤다. 대사들이 서정적 여운이 짙어 여전히 아름답고 감명 깊다. 일테면 수녀들이 늘 기도시간에 늦는 마리아를 혼내라고 원장에게 종용하자, 원장은 “말썽 부리는 양이라도 털은 따뜻하다”며 감싼다. 그럼 마리아에게 방울이라도 달아놓기를 촉구하자, 원장은 “모래위의 파도를 어찌 잠재울까요. 저 달빛을 어떻게 손 안에 넣을 수 있겠는가”라는 노래로 답한다. 얼마나 함축성 있는 시어들인가.

영화가 끝나니 이미 오스트리아(고대 독일어로 ‘동쪽의 영토’란 뜻의 단어가 라틴화한 것)란다. 국경도 검문도 아무런 징후나 제지도 없었기에 기분이 묘하다. 새삼 조국의 뼈아픈 현실이 상기돼 가슴이 저려온다. 면적은 남한보다 약간 적고, 옛날엔 독일과 한 영토였기에 독어를 사용한다. 호헤 타우렌 산맥을 낀 알프스 동부 고산지대로 동계올림픽을 두 번 개최했던 설국이다. 보통 알프스하면 프랑스를 우선 떠올린다. 실은 국토의 3분의 2나 알프스산지인 오스트리아가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한다. 바다 없는 내륙국인 대신 호수가 많다.

특히나 알프스산 아래 위치한 짤츠부르크는, 북쪽의 로마라 일컬을 만큼 중세건물이 많다. 태초엔 알프스도 바다였다가 융기됐던 터라, 인근의 소금광산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통행료가 다른 지역보다 싸니까 소금무역이 왕성해져, 많은 유동인구로 부유도시성장발판이 됐다. 첫인상은 역시 아기자기하고 고풍스럽다. ‘어머! 여기 동화나라가 또 있네!’했다.

구시가 남쪽에 이곳 상징인 최고의 고성 짤츠부르크 성채가 어느 지점에서도 눈에 띄게 우뚝 서있다. 1077년 대주교가 유사시의 공격에 대비키 위해 언덕 위 거대한 암반에 지은 요새다. 성을 짓느라 60채의 집을 철거했다니 성의 규모가 가늠된다. 조금 걸어 올라가 성 밑에서 트램을 탔는데 급경사라 거의 수직상승이다.

성채의 넓은 정원엔 꽃들의 천국인데 족두리꽃(풍접초)도 있어 반갑다. 보리수가 많다했더니 슈베르트가 가곡 ‘보리수’를 여기서 영감을 얻어 작곡 했단다. 900년 역사를 간직한 고성을 삥 둘러싼 성벽은 이른바 파노라마전망대다. 빼어난 전경에 넋을 앗길 정도다. 멀리 알프스산을 배경으로 순하게 흐르는 찰자흐강과 다리, 벽돌색 지붕의 아기자기한 집들이 연출하는 풍광이 완전 매력이다. 성 밑 숲속에 싸인 집들도 하나같이 명품산장이다. ‘사운드 오브 뮤직’의 도입부에 마리아가 노래하는 장면에서다. “산들이 오라 손짓하는 바람에, 향기로운 향기에, 구름 위로 올라가듯 한다.”고. 정말 이런 노래가 나올 밖에 없는 정경이다.

성안으로 들어가니 당시의 대포도, 우물도, 그 자리에 그대로다. 황금홀엔 1500년 전에 만든 난로가 여태껏 있고, 하이든과 모차르트가 사용했던 수궁 식 파이프오르간도 있다. 이런 아름다운 성이 2차 대전 이후엔 나치전범들의 감옥이기도 했다니 모순이다.
카피텔 광장의 베드로성당은 앞에 예수님과 바울 등 네 명의 동상이 있어 로마의 베드로성당과 비유된다. 이곳이 유명한 이유는 모차르트가 세례를 받고, 그의 누이와 교향곡의 아버지 하이든이 묻혀있는 것. 안에 들어가니 과연 웅장하고 경건해 절로 숙연해진다.

성당의 뒤쪽이 바로 ‘사운드 오브 뮤직’의 마지막에 트랩대령과 마리아가 애들을 데리고 숨어있던 곳이다. 철문과 안에 키 큰 비석들이 즐비한 게 영화장면과 똑같다. 당연한 일인데도 기시감이 든다. 앞에 묘지들은 작은 비석과 예쁜 꽃단장으로 묘지가 아닌 화단 같다.

어느 웅장한 저택 앞이다. 비공개라 철문 안을 기웃하니 지휘하는 모습의 큰 동상이 있다. 바로 20세기 세계적인 명지휘자 폰 카라얀이 태어나고 살던 집이고 그의 동상이었다. 그가 고향이 같은 모차르트를 칭송했던 말이 떠오른다. “세계에 위대한 음악가는 많지만 모차르트는 단 한 사람이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보게 마련이라더니...

옆에 있는 미라벨(라틴어로 ‘아름다운 곳’)정원으로 갔다. 1690년 볼프 디트리히 대주교가 애인 살로메를 위해 지은 바로크양식의 궁과 정원이다. 주교가 파문당한 후론 시민공원과 박물관으로 개방하고 있다. 궁전 안의 홀인 ‘대리석의 방’은 모차르트가 주교를 위해 연주하던 곳인데, 현재는 실내악콘서트홀로 사용하고 있다. 일렬로 서있는 보리수들이 위에만 초록덩이들이 군데군데 달려있는 독특한 형세라 부자연스럽다. 정원 안 그리스신화 영웅들의 대리석상 높이와 맞게끔 일정하게 조율해서란다. 커다란 연못과 분수, 가화요초들의 화단도 빼어나다. 유럽정원의 최고작이라는 살로메의 조각상을 보니 아름답기는 하다.

영화 속의 ‘도레미 송’은 호엔성의 성벽계단에서 시작해 이 정원계단에서 끝난다. 진짜 영화음악이 계속 흘러나오니까, 어디선가 마리아와 애들이 불쑥 불쑥 튀어나오는 환영이 어른거린다. 애석하게도 아역배우였던 큰딸, 막내딸, 남자애들이 이미 세상을 하직했다던가. 영화장면의 계단, 철문, 모든 게 다 그대로인 현장이라 더 허망하다. 출구로 나오니 옆면에 영화장면이 새겨진 영화투어미니버스들이 죽 늘어서있다. 영화촬영지가 이곳 신시가지에 4개소, 구시가지에 11군데나 된다니까. 관광객들이 원래 모차르트 때문에 이곳을 찾았는데, 이 영화로 관광절정을 이뤘단다. 이 도시는 모차르트와 사운드 오브 뮤직영화가 먹여 살린다던 말이 실감난다. 문화예술의 힘은 이리 막강하다.

알프스산지에 싸인 한복판, 강이라기엔 좀 뭐한 찰자흐강이 흐른다. 그 강을 사이로 신, 구시가로 구분된다. 수백 년에 걸쳐 형성된 상업중심지인 구시가로 가려고 건너는 다리 난간에 자물쇠들이 가득이다. ‘다리가 얼마나 무겁고 힘들까!’ 실제 붕괴위험으로 정기철거를 한단다. 소설가 김영하씨가 말했다. “우리는 불완전한 사랑을 극복하기 위해 단단하고 완전해 보이는 바위나 자물쇠에 사랑을 남기는 것”이라고. 수긍 가는 지적이다. 세월의 불가항력에 사랑이 부서질 확률이 더 높으니까. 사랑맹세의 자물쇠들이 낭만보단 허무인 이유다.

게트라이트 길은 좁은 골목이지만 이른바 구시가의 명동이다. 프랑스의 모리악은 “게르만주의와 라틴주의가 황홀하게 만나는 길”이라고 표현했다. 독일처럼 문맹자들을 위해 건물 밖에 수직으로 걸린 수공예간판들이 예술이다. 구둣가게인지 주조물원 안에 구두가 대롱대롱 달려있어 웃음이 난다.

건물들도 다 예쁜데 어느 한 집이 유난히 색깔이 확 튄다. 노랑과 살색을 섞은 것쯤 될까. 당시 마리아 테레지아 제후의 기호색이라 마리아 테레지아 칼라라 칭한다는 그 색이다. 모차르트가 태어나 17세까지 살았다는 생가였다. 국경일도 관공서도 아닌데 오스트리아 국기가 걸려있다. 알고 보니 어느 건물이든 국기가 걸려있으면 중요인물과 연관되거나 역사적 가치가 있다는 표시고, 국기의 크기는 중요도의 척도란다. 그런데 거의 4층 건물의 키만큼 기다란 국기이니 모차르트가 얼마나 사랑받고 있는지 알겠다. 1층은 그가 사용했던 피아노와 바이올린, 악보원본이 있고, 2층엔 오페라와 관련된 자료들, 3,4층은 가족들의 생활공간을 그대로 재현해 놓았단다.

알프스 산 배경으로 한 풍광 뛰어난  ‘소금 성’

모차르트의 생가


그뿐인가. 모차르트 동상이 있는 곳엔 모차르트아버지가 즐겨 찾았다는 300년 전통의 유서 깊은 토마젤리(Tomaselli)카페가 있다. 우리나라라면 그런 역사지킴이 가능키나 하겠는가. 또한 모차르트가 좋아했다는 케이크인 토르테와 일명 모차르트 초콜릿인 쿠겔린(Kugelin)을 파는 상점이 너무 많다. 쇼윈도마다 각종 기념품과 초콜릿, 온갖 상품이 모차르트의 얼굴이 인쇄된 포장지로 관광객들의 눈을 끈다. 각종 매장이 다 그러니 상혼이 무섭다. 모차르트의 생전엔 외면해서 궁핍 속에 스러지게 해놓고, 진짜 시신도 못 찾는다면서, 사후엔 이리 이용해도 되나싶어서다. 너무 상품화시켜 세계인 모두가 귀히 사랑하는 천재음악가의 위상이 떨어질까 우려돼서다. 한편으론, 사랑받는 데는 고고하고 엄숙한 외로움 보다는, 따뜻한 대중성이 더 친근할지도 모른다는 쪽으로 생각해도 씁쓸하긴 마찬가지다.

아인슈타인도 “나에게 죽음이란 더 이상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을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다. 하이든 역시 “모차르트가 오직 현악 4중주곡과 진혼곡인 레퀴엠만을 남겼더라도 영원한 명성을 얻는데 충분했을 거라고.”그런데 그는 짧은 35년의 생애동안 무려 600여곡이나 남겼으니... 정말 인류에겐 아까운 손실이었다는 사실만 절감하게 된다.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으며 그의 얼굴로 도배 되다시피 한 거리를 착잡한 심상(心狀)으로 걸었다. 음악가는 아니지만 모차르트를 좀 알고 피부로 느껴보게 된 점이 수확이라면 수확이었다.

슬슬 배가 고파진다. 저녁은 중식으로 대여섯 가지의 코스요리라 뉴욕의 중식당에 온 것 같다. 9시가 지나도 저물지 않고 훤해 이상하다. 백야는 아닐 거고 신기하다. 해가 길은 덕에 숙소로 가는 길의 계곡과 알프스를 눈에 담을 수 있어 행복하지만. 꼬불꼬불 심산유곡을 지나 산골마을로 자꾸 올라갔다. 9시 30분이 지나서야 완전어둠에 쌓였다. 10시에야 자그마한 산장호텔로 들어갔다.
독일에서 오스트리아까지 국경도 검문도 없어 기분 묘해
바다 융기된 알프스 산$인근 소금 광산으로 사람들 몰려들어 산업 발전
언덕위 거대한 암반위 지은 요새 짤츠부르크 성은 60채 집 허물고 지어
미라벨 정원은 볼프디트리히 대주교가 애인살로메를 위해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

뮌헨 다음 행선지는 영세중립국인 오스트리아의 짤츠부르크다. 소금을 뜻하는 짤츠와 성을 뜻하는 부르크니 '소금 성'에 가는 셈이다. 인구 약 150만 명의 유럽서부 작은 도시지만, 9년 연속 살기 좋은 도시 1위로 뽑히기도 했었다. 미풍에 흔들리는 벼 같은 청 보리들판에, 오스트리아가 가까워오는지 알프스 산들이 배경으로 등장, 풍광이 더 멋져졌다. 땅이 비옥한지 소나무들이 뒤틀리지 않고 곧고 가늘고 키가 크다.

가는 길이 영화 ‘Sound of Music’의 촬영지라 영화를 봤다. 대사들이 서정적 여운이 짙어 여전히 아름답고 감명 깊다. 일테면 수녀들이 늘 기도시간에 늦는 마리아를 혼내라고 원장에게 종용하자, 원장은 “말썽 부리는 양이라도 털은 따뜻하다”며 감싼다. 그럼 마리아에게 방울이라도 달아놓기를 촉구하자, 원장은 “모래위의 파도를 어찌 잠재울까요. 저 달빛을 어떻게 손 안에 넣을 수 있겠는가”라는 노래로 답한다. 얼마나 함축성 있는 시어들인가.
알프스 산 배경으로 한 풍광 뛰어난  ‘소금 성’

사운드오브 뮤직의 묘지 촬영 장소


영화가 끝나니 이미 오스트리아(고대 독일어로 ‘동쪽의 영토’란 뜻의 단어가 라틴화한 것)란다. 국경도 검문도 아무런 징후나 제지도 없었기에 기분이 묘하다. 새삼 조국의 뼈아픈 현실이 상기돼 가슴이 저려온다. 면적은 남한보다 약간 적고, 옛날엔 독일과 한 영토였기에 독어를 사용한다. 호헤 타우렌 산맥을 낀 알프스 동부 고산지대로 동계올림픽을 두 번 개최했던 설국이다. 보통 알프스하면 프랑스를 우선 떠올린다. 실은 국토의 3분의 2나 알프스산지인 오스트리아가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한다. 바다 없는 내륙국인 대신 호수가 많다.

특히나 알프스산 아래 위치한 짤츠부르크는, 북쪽의 로마라 일컬을 만큼 중세건물이 많다. 태초엔 알프스도 바다였다가 융기됐던 터라, 인근의 소금광산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통행료가 다른 지역보다 싸니까 소금무역이 왕성해져, 많은 유동인구로 부유도시성장발판이 됐다. 첫인상은 역시 아기자기하고 고풍스럽다. ‘어머! 여기 동화나라가 또 있네!’했다.

구시가 남쪽에 이곳 상징인 최고의 고성 짤츠부르크 성채가 어느 지점에서도 눈에 띄게 우뚝 서있다. 1077년 대주교가 유사시의 공격에 대비키 위해 언덕 위 거대한 암반에 지은 요새다. 성을 짓느라 60채의 집을 철거했다니 성의 규모가 가늠된다. 조금 걸어 올라가 성 밑에서 트램을 탔는데 급경사라 거의 수직상승이다.

성채의 넓은 정원엔 꽃들의 천국인데 족두리꽃(풍접초)도 있어 반갑다. 보리수가 많다했더니 슈베르트가 가곡 ‘보리수’를 여기서 영감을 얻어 작곡 했단다. 900년 역사를 간직한 고성을 삥 둘러싼 성벽은 이른바 파노라마전망대다. 빼어난 전경에 넋을 앗길 정도다. 멀리 알프스산을 배경으로 순하게 흐르는 찰자흐강과 다리, 벽돌색 지붕의 아기자기한 집들이 연출하는 풍광이 완전 매력이다. 성 밑 숲속에 싸인 집들도 하나같이 명품산장이다. ‘사운드 오브 뮤직’의 도입부에 마리아가 노래하는 장면에서다. “산들이 오라 손짓하는 바람에, 향기로운 향기에, 구름 위로 올라가듯 한다.”고. 정말 이런 노래가 나올 밖에 없는 정경이다.

성안으로 들어가니 당시의 대포도, 우물도, 그 자리에 그대로다. 황금홀엔 1500년 전에 만든 난로가 여태껏 있고, 하이든과 모차르트가 사용했던 수궁 식 파이프오르간도 있다. 이런 아름다운 성이 2차 대전 이후엔 나치전범들의 감옥이기도 했다니 모순이다.
카피텔 광장의 베드로성당은 앞에 예수님과 바울 등 네 명의 동상이 있어 로마의 베드로성당과 비유된다. 이곳이 유명한 이유는 모차르트가 세례를 받고, 그의 누이와 교향곡의 아버지 하이든이 묻혀있는 것. 안에 들어가니 과연 웅장하고 경건해 절로 숙연해진다.

성당의 뒤쪽이 바로 ‘사운드 오브 뮤직’의 마지막에 트랩대령과 마리아가 애들을 데리고 숨어있던 곳이다. 철문과 안에 키 큰 비석들이 즐비한 게 영화장면과 똑같다. 당연한 일인데도 기시감이 든다. 앞에 묘지들은 작은 비석과 예쁜 꽃단장으로 묘지가 아닌 화단 같다.

어느 웅장한 저택 앞이다. 비공개라 철문 안을 기웃하니 지휘하는 모습의 큰 동상이 있다. 바로 20세기 세계적인 명지휘자 폰 카라얀이 태어나고 살던 집이고 그의 동상이었다. 그가 고향이 같은 모차르트를 칭송했던 말이 떠오른다. “세계에 위대한 음악가는 많지만 모차르트는 단 한 사람이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보게 마련이라더니...

옆에 있는 미라벨(라틴어로 ‘아름다운 곳’)정원으로 갔다. 1690년 볼프 디트리히 대주교가 애인 살로메를 위해 지은 바로크양식의 궁과 정원이다. 주교가 파문당한 후론 시민공원과 박물관으로 개방하고 있다. 궁전 안의 홀인 ‘대리석의 방’은 모차르트가 주교를 위해 연주하던 곳인데, 현재는 실내악콘서트홀로 사용하고 있다. 일렬로 서있는 보리수들이 위에만 초록덩이들이 군데군데 달려있는 독특한 형세라 부자연스럽다. 정원 안 그리스신화 영웅들의 대리석상 높이와 맞게끔 일정하게 조율해서란다. 커다란 연못과 분수, 가화요초들의 화단도 빼어나다. 유럽정원의 최고작이라는 살로메의 조각상을 보니 아름답기는 하다.

영화 속의 ‘도레미 송’은 호엔성의 성벽계단에서 시작해 이 정원계단에서 끝난다. 진짜 영화음악이 계속 흘러나오니까, 어디선가 마리아와 애들이 불쑥 불쑥 튀어나오는 환영이 어른거린다. 애석하게도 아역배우였던 큰딸, 막내딸, 남자애들이 이미 세상을 하직했다던가. 영화장면의 계단, 철문, 모든 게 다 그대로인 현장이라 더 허망하다. 출구로 나오니 옆면에 영화장면이 새겨진 영화투어미니버스들이 죽 늘어서있다. 영화촬영지가 이곳 신시가지에 4개소, 구시가지에 11군데나 된다니까. 관광객들이 원래 모차르트 때문에 이곳을 찾았는데, 이 영화로 관광절정을 이뤘단다. 이 도시는 모차르트와 사운드 오브 뮤직영화가 먹여 살린다던 말이 실감난다. 문화예술의 힘은 이리 막강하다.

알프스산지에 싸인 한복판, 강이라기엔 좀 뭐한 찰자흐강이 흐른다. 그 강을 사이로 신, 구시가로 구분된다. 수백 년에 걸쳐 형성된 상업중심지인 구시가로 가려고 건너는 다리 난간에 자물쇠들이 가득이다. ‘다리가 얼마나 무겁고 힘들까!’ 실제 붕괴위험으로 정기철거를 한단다. 소설가 김영하씨가 말했다. “우리는 불완전한 사랑을 극복하기 위해 단단하고 완전해 보이는 바위나 자물쇠에 사랑을 남기는 것”이라고. 수긍 가는 지적이다. 세월의 불가항력에 사랑이 부서질 확률이 더 높으니까. 사랑맹세의 자물쇠들이 낭만보단 허무인 이유다.

게트라이트 길은 좁은 골목이지만 이른바 구시가의 명동이다. 프랑스의 모리악은 “게르만주의와 라틴주의가 황홀하게 만나는 길”이라고 표현했다. 독일처럼 문맹자들을 위해 건물 밖에 수직으로 걸린 수공예간판들이 예술이다. 구둣가게인지 주조물원 안에 구두가 대롱대롱 달려있어 웃음이 난다.

건물들도 다 예쁜데 어느 한 집이 유난히 색깔이 확 튄다. 노랑과 살색을 섞은 것쯤 될까. 당시 마리아 테레지아 제후의 기호색이라 마리아 테레지아 칼라라 칭한다는 그 색이다. 모차르트가 태어나 17세까지 살았다는 생가였다. 국경일도 관공서도 아닌데 오스트리아 국기가 걸려있다. 알고 보니 어느 건물이든 국기가 걸려있으면 중요인물과 연관되거나 역사적 가치가 있다는 표시고, 국기의 크기는 중요도의 척도란다. 그런데 거의 4층 건물의 키만큼 기다란 국기이니 모차르트가 얼마나 사랑받고 있는지 알겠다. 1층은 그가 사용했던 피아노와 바이올린, 악보원본이 있고, 2층엔 오페라와 관련된 자료들, 3,4층은 가족들의 생활공간을 그대로 재현해 놓았단다.

그뿐인가. 모차르트 동상이 있는 곳엔 모차르트아버지가 즐겨 찾았다는 300년 전통의 유서 깊은 토마젤리(Tomaselli)카페가 있다. 우리나라라면 그런 역사지킴이 가능키나 하겠는가. 또한 모차르트가 좋아했다는 케이크인 토르테와 일명 모차르트 초콜릿인 쿠겔린(Kugelin)을 파는 상점이 너무 많다. 쇼윈도마다 각종 기념품과 초콜릿, 온갖 상품이 모차르트의 얼굴이 인쇄된 포장지로 관광객들의 눈을 끈다. 각종 매장이 다 그러니 상혼이 무섭다. 모차르트의 생전엔 외면해서 궁핍 속에 스러지게 해놓고, 진짜 시신도 못 찾는다면서, 사후엔 이리 이용해도 되나싶어서다. 너무 상품화시켜 세계인 모두가 귀히 사랑하는 천재음악가의 위상이 떨어질까 우려돼서다. 한편으론, 사랑받는 데는 고고하고 엄숙한 외로움 보다는, 따뜻한 대중성이 더 친근할지도 모른다는 쪽으로 생각해도 씁쓸하긴 마찬가지다.

아인슈타인도 “나에게 죽음이란 더 이상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을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다. 하이든 역시 “모차르트가 오직 현악 4중주곡과 진혼곡인 레퀴엠만을 남겼더라도 영원한 명성을 얻는데 충분했을 거라고.”그런데 그는 짧은 35년의 생애동안 무려 600여곡이나 남겼으니... 정말 인류에겐 아까운 손실이었다는 사실만 절감하게 된다.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으며 그의 얼굴로 도배 되다시피 한 거리를 착잡한 심상(心狀)으로 걸었다. 음악가는 아니지만 모차르트를 좀 알고 피부로 느껴보게 된 점이 수확이라면 수확이었다.

슬슬 배가 고파진다. 저녁은 중식으로 대여섯 가지의 코스요리라 뉴욕의 중식당에 온 것 같다. 9시가 지나도 저물지 않고 훤해 이상하다. 백야는 아닐 거고 신기하다. 해가 길은 덕에 숙소로 가는 길의 계곡과 알프스를 눈에 담을 수 있어 행복하지만. 꼬불꼬불 심산유곡을 지나 산골마을로 자꾸 올라갔다. 9시 30분이 지나서야 완전어둠에 쌓였다. 10시에야 자그마한 산장호텔로 들어갔다.

그뿐인가. 모차르트 동상이 있는 곳엔 모차르트아버지가 즐겨 찾았다는 300년 전통의 유서 깊은 토마젤리(Tomaselli)카페가 있다. 우리나라라면 그런 역사지킴이 가능키나 하겠는가. 또한 모차르트가 좋아했다는 케이크인 토르테와 일명 모차르트 초콜릿인 쿠겔린(Kugelin)을 파는 상점이 너무 많다. 쇼윈도마다 각종 기념품과 초콜릿, 온갖 상품이 모차르트의 얼굴이 인쇄된 포장지로 관광객들의 눈을 끈다. 각종 매장이 다 그러니 상혼이 무섭다. 모차르트의 생전엔 외면해서 궁핍 속에 스러지게 해놓고, 진짜 시신도 못 찾는다면서, 사후엔 이리 이용해도 되나싶어서다. 너무 상품화시켜 세계인 모두가 귀히 사랑하는 천재음악가의 위상이 떨어질까 우려돼서다. 한편으론, 사랑받는 데는 고고하고 엄숙한 외로움 보다는, 따뜻한 대중성이 더 친근할지도 모른다는 쪽으로 생각해도 씁쓸하긴 마찬가지다.

아인슈타인도 “나에게 죽음이란 더 이상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을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다. 하이든 역시 “모차르트가 오직 현악 4중주곡과 진혼곡인 레퀴엠만을 남겼더라도 영원한 명성을 얻는데 충분했을 거라고.”그런데 그는 짧은 35년의 생애동안 무려 600여곡이나 남겼으니... 정말 인류에겐 아까운 손실이었다는 사실만 절감하게 된다.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으며 그의 얼굴로 도배 되다시피 한 거리를 착잡한 심상(心狀)으로 걸었다. 음악가는 아니지만 모차르트를 좀 알고 피부로 느껴보게 된 점이 수확이라면 수확이었다.

슬슬 배가 고파진다. 저녁은 중식으로 대여섯 가지의 코스요리라 뉴욕의 중식당에 온 것 같다. 9시가 지나도 저물지 않고 훤해 이상하다. 백야는 아닐 거고 신기하다. 해가 길은 덕에 숙소로 가는 길의 계곡과 알프스를 눈에 담을 수 있어 행복하지만. 꼬불꼬불 심산유곡을 지나 산골마을로 자꾸 올라갔다. 9시 30분이 지나서야 완전어둠에 쌓였다. 10시에야 자그마한 산장호텔로 들어갔다.

<방인숙/ 수필가>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