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껍질 벗기기 까다롭고 귀찮아, 같은 열대과일 바나나에 밀려
▶ 슬라이서로 손질하면 편하지만, 칼로 직접 손질해야 맛도 좋아
파인애플을 반으로 갈라 안을 파내면 볶음밥을 담아 먹을 수 있다.
파인애플을 피자에 올린 하와이안 피자.
어느 날, 아침 산책길에 파인애플을 사왔다. 할인가 3,000원. 약 50% 쌌다. 와, 엄청 싸게 파시네요. 주인은 대꾸가 없었고 버리고 가라며 윗동을 꺾으려는데 어째 힘을 많이 쓰고 있었다. 잘 안 익은 것 같은데. 예감이 불길했지만 3,000원이니까 큰 의심 없이 들고 온 파인애플은 썰어보니 속이 곯아 먹을 수 없었다. 그대로 음식물 쓰레기통에 던져 넣는 마음이 착잡했다.
저렴하고 맛 좋은 파인애플 그런데 한겨울에 웬 파인애플인가. 겨울 과일이었던 귤이 여름에도 나오는 현실이라면 겨울의 파인애플이 딱히 이상할 게 없다. 또한 국산 과일이 ‘꽃길’만 걷는다고 보기도 어렵다. 늘 말해 왔지만 뭉툭한 단맛만 두드러지고 즙이 아닌 물이 흥건하다. 게다가 올해는 폭염 탓에 한결 더 맛이 없었다. 이제 겨울이지만 사정이 크게 다르지는 않다. 배는 싱겁고 이제 막 등장한 딸기는 가격 때문에라도 손이 선뜻 가지 않는다.
이런 현실에서 파인애플 같은 열대과일이 요긴한 틈새가 있다. 비싸지 않고 단맛과 신맛 둘 다 생생하게 겸비했으며 사시사철 안정적으로 먹을 수 있다. 그래도 수입과일일 뿐이라고? 2017년 가장 많이 소비된 과일은 바나나이다. 든든하고 부드러우면서 자기 주장 강한 단맛을 지녔고, 비싸지 않고 칼륨이 운동이나 숙면에 도움을 준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정작 소비 1위의 가장 큰 이유는 ‘먹기 쉬워서’였다고 한다. 칼이 전혀 필요 없고 껍질을 벗기기만 하면 그만이니 편하다 못해 안전하다.
같은 열대과일로서 파인애플은 이 지점에서 완벽하게 양 갈래 길을 걷는다. 일단 ‘꽃길’이 있다. 과일보다 인간을 위한 꽃길이다. 껍질을 벗기고 먹기 좋은 크기로 토막까지 쳐져 판다. 그런 수준이 부담스럽다 싶으면 과육만 통째로 발라낸 것도 있고, 그 중간에서 일종의 비상식량(혹은 과일)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는 통조림도 있다. 요즘은 편의점에서 식후 디저트로 딱 좋은 과일컵(포크도 딸린)을 판다.
그런데 껍질을 벗겨 토막까지 낸 제품을 믿고 먹을 수 있을까. 위생 혹은 안전의 측면이라면 그렇다. 하지만 신선도 면에서는 이야기가 좀 다르다. 칼로 자르면 세포벽에 손상을 입으니 그 순간부터 과채류는 내리막길을 걷는다. 그래서 파인애플의 핵심인 단맛과 신맛은 잃지 않되 가장자리가 무딜 수 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시럽, 즉 설탕물이나 파인애플 즙에 담근 통조림이 더 싱싱할 수 있다(열량이 염려된다면 과감히 따라 버리고 과육만 먹으면 한결 덜 부담스럽다). 어쨌든, 이런 수준으로는 만족을 못하겠다는 이들을 위해 일종의 ‘정도’가 있다.
굳이 일종의 ‘정도’라 단서를 단 이유는, 그 안에서도 원한다면 꽃길을 걸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내 손으로 파인애플의 과육을 발라내 싱싱하게 즐기는 좀 더 편한 방법 말이다. 바로 파인애플 슬라이서이다. 막힌 변기를 뚫는 진공 펌프와 묘하게 닮은 가운데, 끝이 깔쭉깔쭉한 파이프를 원반이 감싸고 있어 심에 찔러 넣고 손잡이를 돌리면 마치 나사처럼 나선형으로 파인애플을 뚫고 내려가며 과육만 깔끔하게 발라낸다. 끝까지 내려갔다가 힘주어 손잡이를 당기면 가운데의 심까지 빠진 과육이 마치 한 줄로 곱게 까낸 귤껍질처럼 나선형을 그리며 딸려 올라온다. 뚜껑 역할의 대가리와 속이 빈 파인애플이 덤처럼 딸려 온다. 그대로 심만 잘라내면 프루트펀치나 피냐 콜라다 같은 소위 ‘트로피컬’ 계열 칵테일을, 반으로 가르면 볶음밥을 담아 먹을 수 있다.
그렇다면 파인애플 슬라이서가 그냥 정도 아닐까? 속단은 금물이다. 나는 슬라이서를 공짜로 얻었다. 파인애플 세 통에 딸린 사은품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사려던 참이라 얼씨구나 좋다고 가져와서 써 보았는데, 편하지만 뭔가 감흥이 없었다. 무엇보다 ‘배흘림’이 있는 원통형인 파인애플의 기하학적 특성을 철저하게 무시하는 접근 방식이 싫었다. 깔끔함과 편함을 추구한 나머지 파인애플의 정체성을 존중해주지 못한 달까. 굳이 생김새에만 국한된 문제도 아니다. 슬라이서로 발라낸 중심부와 남겨진 껍질 사이에 버려지는 과육이 은근히 많다. ‘아까우니까 알뜰하게 먹자’라기보다 ‘굳이 버리지 않을 수 있는’ 부분이다.
제대로 맛 내려면 칼로 잘라야 사설이 굉장히 길었다. 그래서 파인애플을 위한 일종의 ‘정도’는 무엇인가? 칼로 직접 손질하기이다. 귀찮은 일 아닌가? 엄밀히 따지면 맞다. 그런데 슬라이서를 쓰더라도 일단 대가리는 썰어내야 하고, 발라낸 과육도 편히 먹으려면 한 입 크기로 썰어주는 게 좋다. 결국 칼과 도마를 꺼내야만 하며 대가리를 썰어 내는 과정까지는 똑같이 거쳐야 한다. 그렇다면 잠깐의 귀찮음을 감수하고 파인애플의 기하학적 정체성을 살려 껍질을 벗겨 보는 건 어떨까. 굳이 길게 사설을 늘어 놓아가면서 제안하는 이유는, 파인애플 손질하기가 칼질 연습에 굉장히 유용하기 때문이다. 일단 대상이 큰 편인지라 아주 세심하게 칼을 다룰 필요가 없다. 따라서 사과나 배처럼 손에 쥐고 껍질을 벗기는 과일보다 칼질이 쉬우면서 더 안전하다.
일단 도마에 눕혀 대가리와 바닥을 썰어 낸다. 공이나 원통에 가까운, 그래서 놓치거나 구르기 쉬운 과채류를 고정시킬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주는 것이다. 이제 세워 오른손잡이라면 왼손으로 잘라낸 윗면을 가볍게 누른 상태에서 칼을 돌려가며 겉껍질을 벗겨낸다. 앞에서 언급했듯 ‘배흘림’이 있으니 곡선을 타고 칼날을 움직여 깎아 낸다는 느낌으로 벗겨낸다. 아린 ‘눈’까지 썰려 나오도록 껍질의 바깥면에서 0.5~1㎝를 벗겨낸다고 생각하면 편하다. 껍질을 벗겨냈다면 그대로 세워둔 채 손만 살짝 벌려, 가운데에 보이는 심을 중심으로 파인애플을 수직으로 사등분한다. 과육보다 좀 더 단단한 심을 가르는 과정에서 칼이 미끄러지거나 등분이 제대로 되지 않는 것을 막기 위해 파인애플을 좀 더 단단하게 잡는다. 4등분된 파인애플을 눕힌 뒤 잘린 면을 따라 또렷하게 보이는 심을 썰어낸다. 비로소 파인애플의 과육만 오롯이 먹을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하지만 입에 넣기는 크므로 썰어 마무리한다. 4등분된 파인애플의 심을 잘라낸 면이 위로 오도록 눕히고 길이 방향으로 칼을 넣어 썬다. 이때도 ‘배흘림’ 탓에 파인애플이 미끄러질 수 있으므로 왼손으로 단단히 잡는다.
네 쪽 모두에 되풀이하면 이제 파인애플은 8등분이 되었다. 다시 잘린, 평평한 면이 도마에 닿도록 눕혀 길이의 수직 방향으로 등분한다. 대체로 5, 6등분으로 썰면 딱 한 입 크기이다. 썰린 그대로 칼등에 올려 준비해 둔 밀폐용기에 옮겨 담는다.
피자에 올리거나 케이크로 굽거나 말끔하고도 낭비 없이 발라낸 파인애플의 과육은 그냥 먹어도 좋지만 역시 피자에 올릴 때 가장 빛이 난다. 하와이안 피자 말이다. 많은 이에게 미움받는데다가 캐나다에서 그리스인이 1962년에 처음 고안했으니 하와이가 고향도 아니지만 맛의 원리에 집중한다면 큰 문제가 없다. 애초에 돼지고기와 그 가공육류와 파인애플, 사과, 자두 등은 단맛과 신맛으로 균형을 잡아줘 짠맛 위주의 음식에서도 고전적인 짝짓기이다. 멜론에 프로슈토를 올린 전채가 ‘단짠’의 대조 및 과일과 돼지 비계가 각각 지닌 부드러움의 조화로 간단하면서도 효율적인 맛의 조합을 보여주는데, 멜론을 파인애플로 대체하면 단맛과 신맛이 모두 두드러지며 느낌이 사뭇 달라진다.
하와이안 피자 수준으로 파인애플을 익혀 먹는데 거부감이 없다면 아예 푹 조리는 길도 있다. 사과로 타르트 타탕(사과를 팬의 바닥에 깔고 반죽을 올려 구운 뒤 뒤집는 파이)을 만든다면, 파인애플로는 업사이드 다운 케이크를 만들 수 있다. 파인애플을 무쇠팬 등에 조리다가 반죽을 붓고 오븐에서 구워 마무리한 뒤 뒤집는 디저트인데, 대체로 팬에 익히고 반죽을 붓는 과정이 귀찮아 과육만 오븐에 조려 먹는다. 썬 파인애플을 팬에 담고 흑설탕을 넉넉히 뿌리고 소금 약간으로 간한 뒤 그대로 180℃의 오븐에 넣어 색이 진해지고 과육이 부드러워질 때까지 30~45분가량 익힌다. 엿이나 꿀에 절인 정과와 크게 다르지 않다. 향신료치고도 전통 음료 수정과 덕에 거부감이 적은 계피를 몇 점 뚝뚝 꺾어 더해 조리면 그냥 먹어도 좋고 파운드 케이크나 아이스크림에 잘 어울리는 디저트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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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재·음식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