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영화 부도의 날’

2018-12-07 (금)
작게 크게
1988년 서울 올림픽은 한국사회를 바꿔놓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한국이 금메달 수로 소련과 동독, 미국에 이어 4위를 하면서 한국인들의 자신감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고 그전까지 6.25 전쟁으로 폐허가 된 나라 정도로 알고 있던 세계인들의 인식도 완전히 바뀌었다.

거기다 원화 가치, 유가, 금리가 동시에 하락하면서 수출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86년 달러당 480원대이던 환율은 88년 880원대로, 40달러에 육박하던 유가는 10달러대로, 27%에 달하던 국채 금리는 11%대로 떨어졌다. 이와 함께 85년 7.7%였던 경제성장률은 86년 11.2%, 87년 12.5%, 88년 11.9%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달성했다. ‘단군 이래 최대 호황’이란 말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그후 불과 10년도 안 돼 한국사회를 강타한 IMF 사태는 이런 대형 호황의 부산물이다. 넘치는 돈을 주체하지 못하던 기업들은 자기가 잘 모르는 분야로 문어발식 확장에 열을 올렸고 은행은 주저없이 돈을 빌려줬다.


가뜩이나 과도한 부채로 기업들이 신음하고 있는 판에 1997년 동남아 외환위기가 발생하면서 연쇄적으로 외국인 투자가들이 돈을 빼기 시작했다. 자기 자본의 수십 배에 달하는 돈을 빌려다 쓴 기업들은 돌아오는 어음을 막지 못했고 1월에는 한보, 3월에는 삼미, 4월에는 진로, 6월에는 한신공영, 10월에는 쌍방울과 태일정밀, 11월에는 해태와 뉴코아가 부도를 냈다.

폭락하는 환율을 방어하느라 외환 보유고가 바닥이 난 한국정부는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는 것 이외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 이것이 20년 전 한국사회를 강타한 IMF 사태의 진상이다.

그 날의 비극을 그린 ‘국가 부도의 날’이란 영화가 한국에서 최근 개봉됐다. 열흘 만에 200만 관객을 동원하는 등 흥행에는 성공하고 있다. 그러나 내용을 보면 엉망이다. 산만하게 온갖 사람이 등장하는데 각자 따로 놀고 중구난방이다.

그러나 빈약한 작품성보다 더 심각한 것은 일관된 사실 왜곡이다. 이 영화는 한국을 IMF에 통째로 넘기려는 사악한 정부관리들에 맞서 고군분투하는 한국은행 간부의 활약상을 줄거리로 하고 있는데 실제로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 영화에서 한국 경제부처 관리들은 시종일관 서민들에게는 고통을 안기고 나라를 IMF에 바치려는 악당으로 나온다. 도대체 한국관리들은 그 때 무슨 영광을 보려고 그런 매국노 같은 일을 저질렀을까. 이들이 초기 대응에 미숙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나름대로 한국을 살리기 위해 노력했고 그 때문에 한국은 IMF 체제를 조기 졸업하고 재도약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지금 한국인들이 힘들게 살고 있는 것은 그 때 매국 관리들이 저지른 악행 때문이라며 반기업, 반미 정서를 고취하며 대중을 선동하고 있다. 위기에 처한 한국경제 회생을 도운 IMF는 악마로 재포장됐다. 한국 영화계의 좌편향 성향은 어제 오늘 일은 아니지만 진실을 추구하는 예술 본연의 목적에서 이토록 먼 영화도 드물 것이다. 가히 ‘영화 부도의 날’이라 불러 손색이 없다.

이 영화에서 영웅으로 나오는 한국은행 팀장 역을 맡은 김혜수는 “나라와 국민을 보호하는 장치를 다 포기한 굴욕적인 협상에 피가 거꾸로 솟았다”고 말했는데 IMF 사태의 본질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라면 피가 거꾸로 솟을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이 영화일 것 같다.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