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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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나에 지하세계로 추락될지 모르는 지점에 발을 딛고…

2018-12-07 (금) 정진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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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an Antonio Ridge Traverse ( Baldy to Iron ) <하>

▶ 무사히 평지를 밟는 순간,년 맺힌 응어리가 뻥~ 모든 일은 다 때가 있나…

찰나에 지하세계로 추락될지 모르는 지점에 발을 딛고…

White Rock Area.

찰나에 지하세계로 추락될지 모르는 지점에 발을 딛고…

West Baldy의 서쪽 능선에 발생한 산불과 정찰기.


암벽을 오르는 방법을 체계적으로 배운 적이 없는 나에게 Jason이 ‘3 Points’라는 요령을 알려 준다. 즉, 두 발과 두 손의 4개 부위 중 어느 경우라도 3개의 부위는 확실한 접지상태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몸을 이동할 경우에, 한 손 또는 한 발만을 뗀 상태에서 접지점을 찾아 나간다는 식이다. 누구라도 본능적으로 당연히 그렇게 하는 요령이겠으나, 이렇듯 실전 현장에서 그것이 믿을 만한 확실한 기본원칙임을 알게 되니 훨씬 든든하다.

절벽면의 중간 위치에 있던 Sunny가, 앞장서서 대략적으로 길을 살피고 다시 중간쯤으로 내려와 있는 Jason의 의견을 참작하며, 고사목이 서있는 꼭지점을 향해 올라간다. 밑에서 보는 사람은 마냥 불안한데, 고사목의 뒤쪽까지 전혀 어렵지 않은 동작으로 올라 서서, 이 루트의 안전함을 확인해 준다. 아래에서 보는 Sunny는 이제는 이미 인간세상의 여인이 아니다. 부럽기 짝이 없는 ‘천상의 선녀’가 되어 있다. 어느 찰나에 저 아래 지하세계로 추락될지도 모르는 지점에 발을 딛고 있는 나에게는, Sunny가 서있는 저 곳은 이미 인간계의 모든 고통과 고뇌를 다 벗어난 천상이고 선계임이 분명하다.

Susan이 오를 차례이다. Jason이 절벽면의 바로 위에 서서, 한 발 한 발 차분히 오르도록 안내한다. Susan이 전혀 무리없이 매끈한 자세로 바위턱을 넘어 중턱의 안전지대로 올라 선다. 아! Susan도 해냈구나! 역시 Susan답다.


이제 내 차례다. 나만 홀로 아직 아래 사바세계에 남은 것이다. 절벽면을 밑에서 보면 암벽면이 삐죽 삐죽하여 더욱 험상궂어 보이나 실제로 이를 오를 때에는 삐죽 삐죽한 모서리들이 밟거나 잡기에 더 좋은 점이 있다. 단, 이 바위들의 돌출부위가 쉽게 부서지고 떨어져 나오는 특성이 두드러지므로 이를 잡거나 밟을 때 몸을 지탱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단단한지의 여부를 반드시 탐색해야 한다.

정말 다행스럽게도 일행 모두가 다 절벽면을 잘 올라 고사목의 서쪽 능선에 함께 모인다. 지금 올라온 이 Gunsight Notch의 절벽면을 사진으로 남기려고 배낭을 내리고 카메라를 꺼내 서둘러 몇 장의 사진을 찍는다. 다시 바로 앞에는 또 넘어야 할 바위봉이 대단히 위태로워 보이므로 카메라를 다시 배낭에 넣는다. 고사목을 지나 서쪽으로 10m쯤의 폭 좁은 바위길 너머에 있는 10m는 족히 될 듯한 높이의 위압적인 뾰쪽 바위봉이다. 경사각이 70도가 넘을 듯한 대단히 돌올한 암봉인데 다행히 뾰쪽 뾰쪽한 바위 표면을 따라, 마치 사다리의 계단을 밟듯 오르고 또 내릴 수 있었다.

좌우로 아래를 보면 겁이 더럭 날 정도로 양쪽이 다 깎여나간 절벽 지형이다. 위태롭게 느껴지는 험한 길을 용감하게 나아가는 Jason과 Sunny, 아니 Medea를 따라 Susan과 나 모두가 안전하게 이 관문을 통과하고 널찍한 평활지에 도달한다(13:07). 아, 이제 기분이 날아갈 듯 산뜻하다. 8년동안 가슴에 맺혀있던 응어리가 일거에 말끔히 확 뚫린 느낌이다. Jason과 Sunny 그리고 Susan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이들이 있었기에 이 산행이 이루어졌고 이들이 있었기에 Gunsight Notch를 잘 통과할 수 있었다.

불현듯 한가지 상념이 뇌리에 떠 오른다. 8년전의 산행에서 이 Gunsight Notch를 오르지 못하고 산행을 포기했었던 일은 어쩌면 치명적인 사고를 피할 수 있었던 커다란 축복이고 행운이었다는 것이다. 그 때는 사실 이 산행을 무난히 잘 해낼 수 있을 정도로는 준비가 안된 멤버들이 분명히 있었다는 명약관화한 사실을 오늘에야 비로소 두려운 심정으로 깨닫는다.

카메라를 다시 가슴에 부착한다. 타인들이 남긴 기록을 보면 이후에도 2개의 Notch가 더 있다는데, 가장 어렵다는 Gunsight Notch를 잘 통과했다는 기쁨으로 들뜬 때문인지 어디 어디가 다른 Notch들인지 별 관심을 두지 않고, 희열감에 휩싸인 채 일행을 따라 걸음을 재촉한다. 다소 위태로워 보이는 구간들은 있었으나 크게 불안감을 주는 구간은 없었다.

흰 빛깔의 바위들이 지면에 노정된 지대가 나온다(13:20). 아마 이 지역이 등산인들이 White Rock이라 부르는 구간인가 보다. 이곳의 바위들은 대체로 모서리가 창날처럼 예리한 특징이 있어 바위곁을 지날 때는 가외의 주의를 요한다. White Rock구간의 시종점이 분명친 않으나 대략 15분 내외에 이 지역을 통과한다.

이제야 말로 Iron Mountain이 지척이라 생각되는 지점에 이르렀을 때, 뒤로 약 5마일의 거리에 있는 West Baldy 어깨부위의 서쪽 능선상에서 짙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게 된다(14:01). 언뜻 언뜻 붉은 화염도 눈에 띈다. 산불이 난 것이 분명하다. 우리가 오늘 08:30경에 지나왔을 지점인 것 같다. 도대체 인적이 거의 없을 저런 위치에서 대낮에 불이 나다니,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다. Solo Hiker, Suria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추측을 해본다. 혹 위험상황을 맞아 구조신호로 연기를 피우는 것 일지도 모른다. 화재신고를 해야 할 상황이다. Iron 정상에 오르면 전화가 걸릴 거라는 기대감으로 걸음을 재촉한다. 가파른 그러나 안전한 오름길을 Jason, Sunny, Susan에 이어 나도 부지런히 뒤따른다.


드디어 Big Bad Iron의 정상에 선다(14:13; 9.6마일; 8007’). 정상에 오른 감격을 ‘Hi Five!!’로 나눈다. 서둘러 화재신고를 해야 한다. 다행히 통신이 가능하여 Sunny가 911을 경유 Ranger Station에 상황을 설명한다(14:15). 산불의 추이와 신고의 귀추가 궁금하여 계속 화재현장을 관찰한다. 14:45에 비행기 한 대가 나타난다. 14:58에 또 다른 비행기가 나타나 적색 방화제(Fire Retardant)를 살포한다. 뒤를 이어 계속 비행기들이 와서 물을 뿌리고 방화제를 뿌린다. 역시 미국다운 기동성이라 감탄하며 조기진화가 이루어짐에 최초신고자의 일원이 될 수 있었던 보람과 기쁨을 느낀다.

햇살이 비치는 동안 적어도 Allison Saddle까지 내려가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판단으로 정상등록부에 기명을 하고 하산에 임한다. 하산과정에서 간간히 화재현장을 관찰한 바, 모두 10여대의 비행기가 출몰하며 16:20 무렵에는 화재를 완전히 진압한 것으로 보였다.

오늘 따라 서산에 떨어지는 석양이 더 없이 아름답다(16:43). 우리의 산행이 장엄한 하늘의 크나 큰 축하를 받는 듯 하다. 헤드램프를 착용한다(17:20). 긴 하산길이지만 San Antonio Ridge를 잘 지났다는 기쁨이 커서 전혀 지루하거나 힘들지 않고 마음과 몸이 가볍기만 하다. Heaton Flats Trailhead(18:44)를 거쳐, East Fork Parking에 도착(18:57; 16.9 마일; 2040’)한다.

이로써 15시간 07분에 걸친 긴 산행을 잘 마쳤다. 내 GPS 기록을 바탕으로 재정리하면, 총 16.9마일을 걸었고, Elevation Gain 5700’, Elevation Loss 9900’ 쯤의 산행이다. Baldy를 오를 때 내가 좀 더 잘 걸었더라면 넉넉히 잡아도 14시간 이내로는 산행을 마칠 수 있었을 텐데 라는 점에서 일행에게 미안한 마음이다. 새삼 Jason과 Sunny를 보며 ‘후생가외’란 말을 떠 올린다.

이곳 East Fork Parking에서 우리를 기다린 David의 차로 Manker Flats Parking으로 이동한다. LA 한인타운에 도착(20:50), 몇 잔의 소주에 취하고 푸짐한 성취감에 취하는 ‘Happy Hour’를 가진다.

산행을 마치고 나서 생각하니, 만약 우리가 산행코스를 ‘Iron to Baldy’로 잡았더라면 어쩌면 ‘West Baldy’의 산불과 그 진화작전의 여파로 산행을 마치지 못했을 개연성이 크고, 심지어는 오도 가도 못하는 난처한 상황에 처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Ignacia의 조언과 Y의 전언이 정말 절묘하고 소중했음을 절감한다.

Suria는 어떻게 되었을까? 불이 나기 전에 이미 그곳을 내려와서 다시 Iron을 거쳐 Heaton Flats Trailhead로 돌아오는, 이른바 Boomerang산행을 잘 마쳤을까?

West Baldy에서 Iron 쪽으로 이동할 때는 특히 바람이 세차게 불어, Notch 구간을 지날 일이 더욱 심란했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Notch에 도달했을 때에는 그리도 세차던 바람이 정녕 ‘쥐 죽은 듯’ 고요하였으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 산행은 주변 많은 사람들의 도움은 물론이고, 실로 크나 큰 천우신조의 각별한 수호가 있어서 비로소 가능했음을 깨닫는다. 거듭 모두에게 감사드린다. 2018. 11. 16 <끝>

정진옥 310-259-6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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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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