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실패한 꼼수

2018-11-23 (금)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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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꼼수’란 원래 ‘상대방을 속이거나 실수를 유도하기 위한 수’란 뜻으로 바둑 용어다. 이런 일은 바둑에서만 있는 게 아니다. 현실 사회, 특히 승패에 따라 천국과 지옥이 갈리는 정치판에서 자주 등장한다.

20세기 후반 미국 정치에서 대표적인 정치 꼼수로 꼽히는 것이 1988년 대선 때 공화당이 내보낸 ‘윌리 호튼’ 광고다. 윌리 호튼은 살인죄로 종신형을 언도받고 복역 중이던 흑인 죄수다. 그런 그가 매사추세츠 정부가 실시 중이던 주말 외출 프로그램에 따라 밖에 나왔다 돌아가지 않고 강도 강간 사건을 저질렀다. 나중에 다시 잡혀 아직까지 복역 중이지만 이는 매사추세츠 주지사 출신으로 그 해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나온 마이클 두카키스의 발목을 잡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선거 초반에는 두카키스가 공화당의 조지 부시와 대등하거나 앞서 가는 등 선전했다. 그러나 공화당 대선 캠프는 이 사건을 ‘범죄에 약한 두카키스’라는 이미지 메이킹 도구로 쓰기로 하고 윌리 호튼이 두카키스 러닝메이트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집중적으로 두 사람을 연결시키는 광고를 내보냈다.


그 결과 1988년 선거는 선거인단 수로 426대 111이라는 부시의 압승으로 돌아갔다. 두카키스는 수감자 주말 외출 프로그램을 만든 일도, 호튼을 풀어준 일도 없었지만 자기 임기 때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이유로 선거에서 지고 정계를 은퇴해야 했다.

2004년 아들 부시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당시 선거 판세는 이라크 사태가 풀리지 않으면서 부시의 재선이 위태로운 상태였다. 이 때 공화당이 들고 나온 것이 동성애자 결혼금지에 관한 헌법 개정안이었다. 미국 헌법을 고치기 위해서는 상하원 2/3의 찬성이 있어야 하고 50개주 가운데 3/4이 이에 동의해야 한다. 한 마디로 현실성이 전혀 없는 공약이었다. 그러나 동성애자 결혼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기독교 보수파들을 투표장으로 불러내는 데는 효과적인 소재였다. 결국 이들 표에 힘입어 아들 부시는 가까스로 재선에 성공했다.

올 중간선거에서는 중미 캐러밴이 공화당의 꼼수 소재로 등장했다. 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의 살인적인 살인율에 견디다 못한 주민들이 북진하자 트럼프는 이를 백인 보수파를 투표장으로 불러낼 호재라고 판단, 중미 난민행렬을 침공으로 간주하고 군대를 보내 막겠다고 공언했다.

트럼프는 아무런 증거도 없이 이들 중에 갱단과 회교 테러집단이 잠입했다느니, 이들이 돌을 던질 경우 발포하겠다느니 엄포를 놓기도 했다. 또 현행 이민법이 미국에 들어온 사람은 누구나 난민신청을 할 수 있게 허용하고 있음에도 합법적으로 들어온 사람 이외에는 아예 신청 자격을 박탈하겠다고 하는가 하면 연방헌법이 미국 내 출생자의 시민권 자동부여를 명시하고 있음에도 행정명령으로 이를 뒤집겠다는 헛소리를 늘어놓기도 했다.

그러나 트럼프의 겁주기는 별 효과를 거두지 못한 것 같다. 원래 공화당 지역인 일부 주 연방 상원 선거에서 이기기는 했으나 연방하원은 38석을 내주며 다수당 자리를 빼앗겼다. 선거가 끝나자 자동 시민권 박탈 이야기는 쏙 들어갔고 밀입국자 난민자격 신청 박탈에 관한 행정명령은 연방법원에 의해 제동이 걸렸다.

꼼수로 선거에 이긴 아버지와 아들 부시는 뒤끝이 좋지 못했다. 아버지 부시는 4년 뒤 새까만 후배 빌 클린턴에 나가 떨어졌고 아들 부시는 2008년 금융위기와 함께 ‘사상 최악의 대통령’이란 불명예를 안았다. 역시 정치든 인생이든 정도를 가는 게 맞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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