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가을 제철인 주꾸미를 넣은 떼레노의‘치피론’. 잇쎈틱 제공
얇은 밀가루 면을 바삭하게 구워 둥글게 말고, 그 안에 대구살과 블랙 트러플을 섞어 넣은‘바칼라오’. <잇쎈틱 제공>
얼마 전 한 음식 행사에서 우리나라 식재료의 단순화에 대한 심각성과 안타까움을 논하는 얘기를 들었다. 경제원리에 맞춰 시장에서 가성비 높은 품종만 살아남는다는 것이었다. 예전 시장에서 한국인은 다양한 사과를 맛봤다. 홍옥, 부사, 아오리, 홍로 등 사과 하나도 취향에 맞춰 고를 수 있었다. 어릴 때 접하는 다양한 식재료는 행복한 감정을 비롯해 풍부한 미각을 키워준다. 어릴 때 느꼈던 음식의 향과 맛, 질감의 감정은 말로는 표현하기 힘들지만 우리 마음 속 깊이 자리잡는다. 어릴 적 행복했던 기억을 소환하는 재료 본연의 맛을 살리는 셰프를 찾았다.
서울 종로구 안국동은 사계절 중 가을에 가장 아름답다. 노란 은행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지는 북촌 언덕을 오르면 한적하고 무게 있는 옛 기운과 모던함이 조화를 이룬 ‘떼레노(Terreno)’가 있다. 떼레노는 스페인어로 땅이란 뜻으로, 이름에서 느껴지듯 신승환 셰프가 땅에서 자란 신선한 재료를 스페인의 요리법으로 표현하는 곳이다. 공장에서 찍어낸 소스로 자연의 아름답고 미묘한 맛을 덮어버리는 요즘, 재료 하나하나에 대해 고민하고 연구하는 셰프를 만나는 것은 행운이다. 신 셰프는 어렸을 때 서울 시내에서 음식점을 했던 할머니의 손을 잡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다녔다. 정성 가득 들어간 맛있는 음식을 만드는 할머니의 뒷모습과 가르침으로 요리에 대한 열정의 씨앗이 뿌려졌다. 성인이 되면서 요리를 위해 호주를 시작으로 세계 곳곳을 다니다 스페인 바스크 지방에 정착했다. 바르셀로나와 같이 관광객이 몰리는 큰 도시에 비해 바스크 지방의 요리를 먹을 때마다 매 순간 재료에 감탄하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소와 돼지, 닭, 양 정도의 고기만 식재료로 이용하지만 바스크에서는 사냥한 고기를 사용하거나 양식하지 않은 다양하고도 신선한 해산물로 요리를 만든다. 신 셰프는 바스크에서 식재료에 눈 뜨게 됐다. 바스크에서는 레스토랑 뒤뜰에 텃밭이 있어, 신선한 채소를 바로 바로 식탁으로 올렸다. 떼레노도 식당 바로 위 옥상에 텃밭을 갖고 있다. 신 셰프는 텃밭뿐만 아니라 가축농장도 하고픈 심정이다. 스페인에서 먹었던 새끼 양 구이, 코치니요(새끼 돼지 통 바베큐 구이) 등 다양한 식재료의 특성이 담긴 맛을 내고 싶지만 국내 유통 현실에선 재료 구하기가 쉽지 않아 안타까울 뿐이다.
호주에서 일하던 시절, 바다 옆에 있던 레스토랑에는 갖가지 생선들이 메뉴를 구성했다. 비슷해 보이는 생선도 생으로 먹는 것, 오븐에 굽는 것, 양념을 하는 법 등 재료마다 다양한 요리법이 적용되어 어느 하나 자연의 맛을 놓치지 않았다고 한다. 신 셰프는 제철 재료에 집중한다. 3개월마다 메뉴를 바꾸기에 봄에 갔던 떼레노와 가을에 가는 떼레노는 전혀 다른 맛을 전한다. “꼴뚜기가 가을이 제철이라 꼭 가을에 넣고 싶었어요.” 치피론(Txipironㆍ스페인어로 꼴뚜기)에 대한 신 셰프의 설명에는 재료의 영양과 식감의 장점이 담겨있다. 치피론이 테이블에 올라오는 순간 음식의 아름다움에 감탄이 나온다. 먹물로 윤기 있게 코팅된 밥알 위에 수줍은 듯 올려진 꼴뚜기와 홍합이 그대로 깊은 바닷속에 들어온 듯한 느낌을 준다. 밥알이 하나하나 살아있으면서도 먹물의 부드러움으로 입안에서 스르르 녹아 내린다. 보랏빛이 감도는 보리지꽃과 함께 올라온 투명한 꼴뚜기는 다 같은 낙지과라고 하기에는 모양부터 식감까지 개성이 남다르다. 손가락 한마디 만한 작은 몸집이, 씹을 수록 입 안 잔세포를 하나하나 건드려준다. 꼴뚜기는 젓갈 외에는 이렇다 할 요리가 없어 한동안 먹을 기회가 없어 아쉬웠는데 스페인 요리법으로 만나니 반갑다. 제철인 식재료는 그 자체로 보약이란 말처럼 하나의 밥상이 자연의 힘을 전해준다.
떼레노의 음식은 스페인 바스크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스페인 음식으로 흔히 생각하는 감바스, 빠에야 같은 메뉴는 찾아보기 힘들다. 한국도 남부 전라도 음식 맛이 강한 양념에 기대는 데 비해 강원도는 슴슴한 맛이 있듯이 북부지방에 위치한 바스크는 남부에 비해 간이 약하면서도 무게감이 있다. 특히 재료의 특성을 잘 살려 원재료가 그대로 표현되는 음식 이름이 많다. 떼레노의 메뉴에는 정해진 음식이름 보다는 들어가는 재료가 곧 이름이다. 음식의 설명을 보며 음식을 한번 상상하게 된다. 하지만 접시를 받는 순간 상상력의 한계를 뛰어 넘는 플레이팅에 감탄이 나온다. 작은 새 둥지 모양의 ‘바칼라오(Bacalao)’는 생선요리의 또 다른 식감을 알게 해주는 음식이다. 중동에서 디저트에 많이 쓰이는 ‘카다이프(Kadaif)’에 버터를 발라 바삭하게 구어 둥근 모양을 만들었는데 마치 새둥지 같다. 그 안에 도톰하고 뽀얀 대구살이 블랙 트러플에 감싸여 수줍은 듯 숨어있다. 포크로 대구살과 트러플, 가느다란 카다이프를 한입에 같이 넣으면, 씹을수록 배가 되는 트러플의 향과 함께 카다이프가 입안에 입체적인 맛을 느끼게 한다. 끓일수록 캐러멜처럼 달콤함이 올라오는 양파소스가 대구 아래 있어, 부드러우면서 탱탱한 대구살 사이로 달콤함이 은은하게 올라온다. 즐거운 식감의 축제가 끝날까 아쉬워 오랫동안 천천히 씹으며 즐겨야 할 음식이다. 주인공, 엑스트라 가릴 수 없는 쟁쟁한 식감 전쟁이다.
쌀은 좋은 디저트 재료이기도 하다. 스페인에는 우유에 쌀을 넣고 달콤하게 끓여내 차갑게 식혀 먹는 라이스푸딩이 디저트로 인기가 있다. 떼레노의 ‘아로스 콘 레체(Arroz con leche)’는 쌀의 또 다른 변신이다. 현미의 바삭한 식감과 부드러운 우유 아이스크림의 조화가 식사를 기분 좋게 마무리하게 한다. 화이트 초콜릿 무스 조각은 입에 들어가는 순간 잔거품처럼 녹아 내린다. 어디에도 인공적인 맛은 없다. 디저트의 강한 단맛에 거부감이 있는 사람이라면 은은한 자연 디저트와의 만남을 추천하고 싶다.
요리한 이의 생각과 철학이 음식으로 느껴진다는 것은 맛 이상의 감동을 받는 순간이다. 특히 좋은 철학을 가지고 있는 셰프를 만나는 날은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니라 그의 생각을 흡수하고 오는 듯한 강한 에너지를 받는다. 음식은 단순히 먹는 것이라는 생각보다는 우리의 몸을 감정부터 신체까지 하나하나 채워주는 것이기에 정성이 들어간 음식을 먹으면 맛있다기보다는 행복하다는 표현을 하게 된다. 만약 내가 지금 먹는 음식이 재료를 고르는 순간부터 셰프의 마음과 에너지가 들어있다면,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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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드 샘플ㆍ박은선 잇쎈틱 공동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