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내 한 표의 힘’

2018-11-13 (화)
작게 크게
15세 소녀시절 17세 소년과 결혼했던 텍사스의 그레이스 필립스는 평생 투표를 해본 적이 없었다. 남편은 건설업자로, 그녀는 미용사로 일하며 7남매를 키우는 삶에 여유가 없어서였다. 배심원 통지를 받아 출두하게 되면 빠듯한 생계에 지장을 줄 것이라며 남편이 반대했고 “내 한 표가 무슨 소용?”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82세의 필립스는 금년 생애 첫 투표를 결심했고, 지난 1일 조기투표로 실행에 옮겼다. 호스피스 병원에서 산소통을 매단 채 손녀의 차를 타고 투표소에 도착한 그녀를 본 투표요원들은 투표지를 들고 나와 차창에 가림막을 쳐서 차에서 투표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박수와 환호로 첫 투표를 축하받은 그녀는 선거 전날인 5일 숨졌다. 의식이 아직 있었을 때 남긴 마지막 말의 하나는 “그래도 투표는 했다…”였다. 그녀의 한 표는 물론 ‘카운트’ 되었다.


평생 단 한 번도 투표를 거른 적이 없었던 위스콘신 주의 존 핀터는 지난 6일에도 한 표를 행사했다. 전날 밤 출장에서 돌아오던 길 사슴과 부딪쳐 차가 망가지는 바람에 지팡이에 의지해 1마일을 걸어 투표소로 갔다. 폐기종을 앓고 있는 83세의 핀터에겐 전혀 쉬운 일이 아니었다. 20 걸음마다 숨이 차서 멈춰 서야 했다. 그러나 투표는 “미국인으로서 누리는 최고의 자유”라고 그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뉴욕주 미 여성참정권운동의 선구자 수전 B. 앤서니의 묘비엔 금년에도 수백개의 “I Voted(나 투표했다)” 스티커가 붙었다. 벌써 몇 년째 바람 불고 비가 와도 계속되는 선거일의 전통이다.

앤서니 타계 14년 후 여성의 투표권을 인정한 수정헌법 19조가 채택되었을 때 어린 소녀였던 마가렛 놀우드는 그때의 감격을 기억하며 104세가 된 금년에도 소중한 한 표를 행사했다.

선거가 끝난 지 벌써 1주일이 되었지만 격전이 치러진 여러 지역에선 아직도 당락이 결정되지 못한 상태다. 박빙일수록 한 표의 비중은 커져 간다. 실제로 한 표가 당락을 가른 예는 미 정치사 곳곳에 기록되어 있다. 탄핵 당했던 앤드류 잭슨 대통령의 파직을 면하게 해준 연방의원의 한 표나, 앨 고어 아닌 조지 W. 부시의 손을 들어준 연방대법관의 한 표만이 아니다.

일반 유권자의 한 표가 주지사, 연방하원, 주하원 등의 당락을 가른 경우도 있다. 1839년 매서추세츠 주지사는 총 투표수 중 단 1표로 과반수를 넘긴 5만1,034표를 얻어 적대적 주의회에서의 표결을 면하고 당선되었으며, 1910년 뉴욕 36지구 연방하원 선거에선 민주당 후보가 2만685표를 획득, 2만684표에 그친 공화당 후보를 누르고 승리했다.

1표의 위력은 작년에도 발휘되었다. 버지니아 주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 후보가 똑같이 1만1,608표를 얻은 것. “단 한 표만 더 받았더라면!” 양 진영의 탄식 속에서 결국 추첨으로 공화후보가 당선되었다.

금년엔 중간선거 사상 처음으로 투표참여가 1억 명을 넘어서면서 투표율도 48~49%, 중간선거로는 사상 최고수준에 달할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그러나 이 ‘최고’ 투표율은 바꾸어 말하면 1억 명 이상이 이런저런 이유로 기권했다는 통계이기도 하다.

이들 1억 여 명이 ‘내 한 표의 힘’을 깨닫고 투표를 결심한다면…어떤 놀라운 반전이 기록될 것이지, 2년 후 미국의 11월이 기다려진다.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