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가을이 스민다

2018-11-03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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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스민다. 억겁의 시간에도, 백년의 거리에도 가을이 천천히 스며들었다. 산등성이를 타고 내려온 가을은 완전 무장한 군인처럼 거침없는 보폭으로 마을 구석구석을 그렇게 소리 없이 점령해 가고 있었다.

작은 마을이 가을에 갇히고 만 그날 이후, 밤은 이전보다 더 깊어졌고 마을은 빠르게 그 밤에 익숙해져갔다. 눈이 내리고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서 얼음처럼 얼어가고 있을 먼 산의 나무가 이쪽을 그리워하고 있을 것이었다.

그 날도 늦은 밤까지 내리는 비는 나를 창가로 불러 세웠다. 창밖을 서성이는 바람은 차가웠으나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는 멀리서 찾아온 친구처럼 정겨웠다. 어둠 때문이었는지, 을씨년스러운 날씨 탓인지, 막연한 그리움이 늘어진 현의 그것과도 닮은 소리를 내며 ‘툭’ 하고 떨어졌다.


이른 아침의 출근길은 옷깃을 몇 번이나 고쳐 매만져도 찬바람이 파고들었다. 내일쯤은 좀 더 두툼한 외투를 입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아직 어둠이 물러가지 않은 길로 들어선다. 천천히 걸어도 여전히 길은 길이고, 서둘러 잰 걸음으로 걸어도 길은 길로써 이어져 내 발밑에 놓여 있었다.

나는 그 길을 지난해와 같은 속도로 걷고 있었고, 여전히 두렵고 불안해했다. 수고스러운 내 발걸음에 위로의 한마디를 건네고 싶었지만 옹졸한 마음은 그마저도 거부한다.

아직은 견딜 만하다는 오만으로 간신히 지탱하던 몸이 바람에 휘청거린다. 산다는 것은 누구나에게 조금 외로운 것이라고 생각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후미진 길가에 꽃이 지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꽃은 늘 그곳에서 피고 졌었다. 그러나 오늘도 그 꽃의 흔적을 보고서야 꽃이 그 자리에 피어 있었음을 알아챘다. 아니 어쩌면 너무 많은 것을 지나치며 살았었다.

나는 늘 바빴고 앞만 보며 허둥댔다. 낯선 땅에서 자리잡고 사는 일이 마치 전쟁과 같아서 쉬고 싶다는 생각조차 사치처럼 느껴졌었다. 이 어처구니없는 변명이 가을 이전까지는 늘 유효했다. 그런 나에게 화해의 손길을 내민다. 그동안 무관심했던 모든 것에게도 화해의 악수를 청한다. 가을은 그런 계절이었다.

모처럼의 산행은 그런 나에게 주는 선물이었다. 그동안의 여유없고 시끌벅적한 시간을 비우는 일이기도 했다. 자작나무 숲 사이로 이어진 오솔길을 천천히 걷다가 언덕 아래로 펼쳐진 풍경에 이끌려 숲을 헤치고 다가갔다. 내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굵고 거친 나무 둥지들에 가로 막혀 풍경은 단숨에 뒤로 물러나 버렸다. 나는 걷는 대신 길에서 비켜 선 낡은 벤치에 앉았다. 나는 그 자리에 앉아 달아나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의자가 삐그덕 소리를 냈고, 생각도 덩달아 삐그덕 거렸다.

청명한 햇살에 몸을 내놓고 붉게 타들어 가는 단풍을 보면서도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는 나이가 되었다, 그러나 자신을 내어준 나무에게로 돌아가는 여정이라는 생각과, 끝내는 품음으로써 새로운 탄생을 꿈꾸는 귀향의 다른 이름이라 위로한다. 순환은 태생적으로 슬프나 눈부신 햇살만큼이나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어느새 가을바람과 햇살에 끈적이던 시간이 말라 버렸다.


시인의 부고가 있던 날에도 비가 내렸다. 아름다운 가을의 어느 하루를 찬란하게 물들이며 단풍이라는 이름을 가져 보지도 못한 채, 고된 삶의 끈을 서둘러 내려놓고 도로 위를 뒹구는 초록빛 잎새들을 보았다. 그 순간 인사치레로 건네던 오래된 친구의 안부, 피곤에 지친 아내가 차리는 저녁상, 점점 늦어져 가는 아버지의 발걸음, 그리고 어머니가 좋아하는 버려진 듯 무심한 길가의 코스모스, 이 모든 것이 눈에 보였다.

가을은 가장 작은 것을 보게 했다. 가장 작은 것을 본다는 것은 내가 스스로 작아졌을 때만 가능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잠시 멈춰 서서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가을의 풍경을 눈에 담는다. 낙엽이라는 이름으로 허공에서 벌이는 마지막 춤사위를 아름답게 기억하기로 한다.

오늘도 묵직한 잿빛 하늘은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비를 쏟아 낸다. 이 비가 그치면 바람을 키우던 들판에도 곧 눈이 내릴 것이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듯 그 들판을 거닐 것이고, 지나간 시간은 늘 그렇듯 한폭의 풍경으로 남을 것이었다. 또한 나는 여전히 반쯤 그늘이 되어 버린 빈 벽에 기대어 앉아 결핍에 대해 생각할 것이다. 마음까지 너그러워 지는 일이 어디 그리 쉽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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