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순한 영혼들의 죽음

2018-11-02 (금) 권정희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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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의 신생공화국, 남수단의 양대 부족은 딩카족과 누에르족이다. 살바 키르 대통령은 최대부족인 딩카족 출신이다. 부통령은 누에르족 출신이었는데, 대통령이 5년 전 그를 쿠데타 모의 혐의로 해임하면서 남수단의 비극이 시작되었다. 두 세력 간 권력투쟁이 내전으로 발전해 국민들을 끝없는 가난과 죽음으로 내몰고 있다.

고 이태석 신부의 헌신적 활동을 담은 다큐 영화 ‘울지마 톤즈’로 우리에게 친근한 남수단은 석유 등 천연자원이 풍부해 발전 가능성이 높은 나라이다. 그런 나라가 고통의 질곡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은 종족 간 증오 때문이다. 증오의 뿌리는 그들의 언어에서도 찾을 수가 있다.

딩카족 말로 ‘딩카’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딩카가 아니면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 된다. 누에르 족 말로 ‘누에르’는 ‘원래의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원래의) 사람’ 아닌 ‘그들’은 적일 수밖에 없으니 종족 간 적대감은 깊고도 오래다.


무슨 작은 다른 점만 있어도 ‘우리’와 ‘그들’을 나누는 것이 인간이다. 먹을 것은 귀하고 안전은 위협받던 원시시대, 호모 사피엔스는 낯선 존재들을 경계하고 물리친 덕분에 멸종하지 않고 살아남았다. 배타성은 유전자에 박힌 인간의 본능이다.

하지만 21세기, 인간의 삶의 환경은 바뀌었다. 배타가 아니라 화합이 궁극적으로 살 길이고, 화합만하면 잘 살 수 있는 데도, 당장의 어떤 불안함, 어떤 불이익 혹은 어떤 편견이 사회를 배척과 증오의 장으로 몰아가고 있다.

유대인들이 미국에 정착한 이래 가장 참혹한 비극을 맞았다. 지난 27일 피츠버그, ‘생명나무(Tree of Life)‘ 회당에 백인우월주의자가 난입해 반자동 소총을 난사, 유대인 11명이 사망했다. 첫 장례식이 열린 31일 LA 타임스는 나란히 목숨을 잃은 어느 형제의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안녕 ‘순한 영혼들‘이여”라는 제목을 달았다.

지적장애가 있었던 50대의 형제는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고 회당에서 예배준비 돕기를 좋아하던 따뜻한 사람들이었다고 가족은 회고했다. 증오라고는 모르던 순한 영혼들이 증오의 표적이 되었다. 이유는 하나 유대인이라는 것이다.

유대인 커뮤니티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참극으로 인한 충격만이 아니다. 2,000여년 남의 땅에서 차별받고 살아온 유대인이 지금 미국에서 황금기를 누리고 있던 중이기 때문이다.

유대인 학생을 쿼타제로 막던 대학들에서 총장이 유대인이고, 유대인 출입을 금지하던 리조트들은 유월절 행사를 유치하며, 유대인은 지원도 안 받던 로펌들이 중역회의에 코셔 음식을 내놓는다. 정계, 재계, 학계, 영화계 등에서 가장 성공한 이민집단, 한인들이 배우고 싶어 하는 역할모델이다. 그것이 문제였다. 백인우월주의자들이 위협을 느낀 것이다.

피츠버그 사건은 느닷없이 일어난 사건이 아니다. 지난해 샬롯츠빌 백인우월주의 시위 때 이미 조짐이 보였다. 당시 시위대는 “우리가 유대인들에게 쫓겨날 수는 없다”는 구호를 외쳤었다. 유대인이 미국을 장악하려 든다는 음모론이 이들 사이에서 확산되어왔다.


음모론이 퍼진 데는 두 가지 요인이 기여했다. 첫째는 소셜미디어. 음모론을 퍼트리며 증오를 확대재생산하는 공장으로 온라인사이트 갭(GAB)이 있다. 피츠버그 사건 용의자는 사이트 단골이었다.

중미 캐러밴은 “백인을 내쫓으려고 유대인이 돈을 대서 갈색인종을 불러들이는 것”이라는 음모론에 용의자는 ‘사명감’을 느낀 것 같다. “유대인들은 죽어야한다”고 외치며 그는 총을 쏘았다.

두 번째는 트럼프의 거친 언동. 대통령이 불법이민자, 무슬림 등 소수계를 마구잡이로 비난하자 백인우월주의자들의 기가 살았다. 전에는 감히 할 수 없던 행동과 말을 하기 시작했다.

10월의 넷째 주는 테러의 한주였다. 트럼프의 반대편에 선 민주당 인사들과 CNN에 폭탄소포들이 보내졌고, 피츠버그 회당에서 유대인 11명이 죽었으며, 캔터키에서는 흑인 2명이 사살됐다. 모두가 유색인종, 이민자, 무슬림, 유대인 등 소수계를 증오하는 백인우월주의자들의 소행이다. 분열의 틈을 타고 좀비들이 날뛰고 있다.

다인종 다문화 사회인 미국은 ‘멜팅 팟’ 혹은 ‘샐러드 보울’로 불린다. 전자가 완전한 동화를 강조한다면 후자는 문화적 다양성을 존중한다. 요즘의 분열된 사회상을 보면 ‘멜팅 팟’이 가능한지, ‘샐러드 보울’이기는 한 건지 의구심이 든다.

그보다는 미국을 ‘모자이크’의 나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각양각색의 모자이크들이 조화를 이루며 하나가 될 때 미국의 위대함은 실현된다. 중요한 것은 모자이크 사이를 연결하는 이음새. 평등과 화합이 이음새를 단단하게 한다면, 차별이나 증오는 이음새에 균열을 일으킨다. 각 모자이크들이 그 자체로 건강하고 전체로 조화를 이루려면 통합의 리더십이 필요하다.

이번 중간선거에서는 무엇보다 화합을 추구하는 리더들이 많이 선출되기를 바란다. 더 이상 순한 영혼들이 무고하게 죽는 일이 없도록.

<권정희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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