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허풍선의 허풍

2018-10-03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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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발간된 밥 우드워드의 베스트셀러 ‘공포’에는 한국인들의 눈길을 끌만한 대목이 여러개 있다. 그 중 하나는 양국 경제 관계의 핵심인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죽다 살아난 이야기일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는 대선후보 시절부터 이 협정이 미국에게 “끔찍한” 것이라며 폐기를 공언해 왔다. 그리고 작년 이 약속은 실현될 뻔했다.

우드워드에 따르면 이 상황을 극적으로 막아낸 것은 당시 국가 경제위원장이었던 게리 콘이었다. 대통령이 서명만 하면 즉시 효력이 발생하는 폐기 통고문이 책상 위에 놓여 있는 것을 발견하고 콘은 몰래 가져다 폐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콘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그걸 훔쳤다”고 털어놨다. 트럼프는 편지가 사라진 것도 몰랐다는 것이다.

그런 트럼프가 지난 달 말 뉴욕에서 개정된 한미 FTA에 서명했다. 트럼프는 이 협정이 미국에 크게 유리하게 바뀐 것처럼 떠벌이고 있으나 전문가들은 전 협정과 대동소이한 것으로 보고 있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한국산 트럭제품에 부과되던 25% 관세 부여 기간을 연장하고 한국 안전기준에 미달하는 미국산 자동차 수출 제한을 없앤 것 등이다.


그러나 미국에서 팔리는 한국 트럭 수가 미미하고 한국이 수입하는 미국 차 규모도 적기 때문에 협정 개정에 따른 파급 효과도 제한적이라는 게 다수 견해다.

트럼프가 한미 FTA 보다 더 열을 올린 것은 북미 자유무역협정(NAFTA)이다. 그는 이를 “사상 최악의 협정”이라고 부르며 이 또한 미국에 유리하게 대폭 개정하지 않으면 폐기하겠다고 공언했다. 그러던 트럼프가 지난 주말 협상 시한을 수시간 남겨 놓고 캐나다와 타결에 합의했다.

트럼프는 개정된 협상을 기존 이름 대신 미국과 멕시코, 캐나다 간의 협정이라는 뜻의 ‘USMCA’라고 부르고 있으나 이름 말고는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 개정된 협정문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미국산 낙농제품의 캐나다 진출이 용이해졌다는 것과 관세 면제 혜택을 받기 위해 북미산 부품을 사용해야 하는 비율이 기존 62.5%에서 75%로 높아지고 부품의 최소 45%는 시간 당 16달러 이상 임금을 받는 업체 것이어야 한다는 정도다.

트럼프는 1일 기자회견을 열고 “나는 대선 유세 중 NAFTA를 재협상할 것을 공약했고 오늘 우리는 그 약속을 지켰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새 협정이 몸통은 그대로 두고 화장만 고친 정도로 개악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있다.

미국 낙농업자의 캐나다 수출이 다소 늘어나고 임금이 비싼 미국 노동자가 만든 자동차 부품이 좀 더 많이 사용될 것으로 보이지만 비싼 제품 구매를 강제하고 있어 자동차 가격상승과 판매하락이 우려된다는 것이다.

이 문제 전문가인 월스트릿 저널은 1일자 사설에서 새 북미 자유무역협정은 원판을 개악한 것이라며 보호무역주의를 신봉하는 트럼프가 판을 깨지 않고 큰 틀을 유지한 게 그나마 다행이라고 밝혔다. 저널은 이어 올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이 승리해 다수 의석을 차지할 경우 새 협정을 승인해 줄지 의문이며 원 NAFTA를 지지하는 공화당의원들조차 새 협정에 반기를 들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결국 한국과 캐나다, 멕시코와 맺은 자유무역협정을 깨든지 완전히 바꿔놓겠다는 트럼프의 공약은 허풍선의 허풍으로 끝난 셈이다. 그렇게 된 게 다행이라는 게 우리 시대의 비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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