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캐버노가 대법원으로 가는 길

2018-09-29 (토)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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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년 전 어느 여름날이 2018년 미국의 정국을 흔들고 있다. 수십 년 묻혀있던 그날의 사건으로 한 여성은 평생 트라우마에 시달렸고, 한 남성은 다 잡았던 평생의 꿈이 날아갈 위기에 처했다. 여성은 깊고 큰 아픔을 고통스럽게 공개했고, 남성은 탄탄대로이던 공직 여정에 날벼락처럼 날아든 돌부리에 당황하고 분노했다.

그리고 미국은 1991년 클레어런스 토마스 연방대법관 지명자 인준청문회 당시의 소용돌이를 그대로 다시 마주하며, 27년의 세월이 이 사회를 얼마나 변화시켰는지를 주목하고 있다.

당시 연방상원 법사위 청문회에서 애니타 힐 법대교수가 토마스 지명자의 직장 내 성희롱을 증언하며 백인남성 의원들 앞에서 고군분투했다면, 이번에는 크리스틴 블라지 포드 교수가 그 자리에 섰다.


브렛 캐버노 연방대법관 지명자가 고교시절 자신을 성폭행하려 했다고 주장한 후 그는 지난 2주 온갖 비난과 협박에 시달렸다. 1년 전 발발한 #미투 운동에도 불구, 성추행^폭력 문제와 관련한 이 사회의 남성중심 시각은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았다고 여성들은 분노하고 있다.

1982년 여름, 15살 때 당시 17살이던 캐버노에게 거의 강간을 당했다고 증언한 포드는 시종일관 차분했다. 가장 사적이고 힘든 경험을 만천하에 이야기하는 것이 무서웠지만 그것이 시민의 의무라는 생각에 청문회에 나왔다고 했다. 그의 증언은 구체적이고 분명했고 조용하지만 힘이 있었다.

수십 년 전 그날의 기억에 공백이 있다는 사실을 그는 인정했다. 그러나 자신을 방으로 밀어 넣고 침대에 쓰러트린 후 성폭행하려던 사람이 캐버노라는 사실은 100% 확신한다고 말했다. 일상적 일들은 잊혀져도, 트라우마는 신경전달물질이 암호화해 해마(대뇌 측두엽의 기억담당 부위)에 저장하기 때문에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다고 임상심리학 교수로서 그는 전문적 설명을 덧붙였다.

가장 선명한 기억은 캐버노와 그의 친구가 재미있다는 듯 웃던 소리, 가장 무서웠던 경험은 소리를 지르려는 자신의 입을 캐버노가 손으로 막아 숨이 막힐 것 같았던, 그래서 그가 ‘우발적으로 나를 죽일 수도 있겠다’ 싶은 공포감이었다고 그는 말했다.

그때의 정신적 외상은 수십 년간 이어졌고, 부부간 갈등을 초래해서 지난 2012년 카운슬링을 받아야 했다고 그는 밝혔다.

뒤이어 청문회에 나온 캐버노는 성폭행 의혹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하며 결백을 주장했다. 자신을 끌어내리려는 민주당의 계획적이고 조직적인 중상모략에 수십 년 쌓아온 명성과 가족이 완전히 와해되었다고 그는 분노했다. 북받치는 감정을 누르느라 그는 울먹이기도 하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고교시절 어디선가 포드와 스쳐지나갔을 수는 있어도, 그를 그리고 다른 어떤 누구도 성폭행한 적은 없다고 강하게 부인했다.

한편 “그가 술을 마시면 난폭해지고 공격적이 된다”는 예일대 동창의 언급 그리고 의심의 여지가 없도록 “FBI 수사를 받을 의사가 있느냐”는 민주당 의원들의 질문에 대해 그는 한사코 답을 피했다.


그렇다면 둘 중 하나는 거짓말을 한 걸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1982년 여름날 모였던 소년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열거했던 포드는 “그들은 그날 일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당시 그들의 요란스런 파티들에 비하면 그날 모임은 별게 아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피해자는 트라우마로 시달리는데 가해자는 기억도 못하는 폭력들이 있다. 특별한 악의 없이 그냥 놀이삼아 재미삼아 한 폭력행위들이다. 많은 경우 왕따가 그렇고, 일상적 성희롱^추행이 그렇고 만취해 저지른 성폭행이 그렇다.

“남자가 다 그렇지” “같이 어울린 여자가 문제지” 등 성문제에 있어서 남성에게 너무 관대한 사회적 통념이 수많은 여성들을 피해자로 만들었다. 가해자는 죄책감은커녕 기억도 없으니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피해자들이다. 그들이 “우리는 이렇게 아프다”고 외치기 시작한 것이 #미투 운동이다.

1991년 인준청문회는 ‘성희롱’이라는 용어를 미국사회에 남기고 막을 내렸다. 토마스는 무사히 연방대법원에 입성했다. 하지만 그때의 분노한 여성표심이 1992년 선거에서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은 여성의원들을 탄생시켰다.

중간선거가 한달여 앞으로 다가온 지금, 공화당은 92년 선거를 잊을 여건이 못 된다. 이번에는 #미투 운동까지 가세하지 않았는가. 공화당 주도 상원 법사위는 28일 캐버노 인준안을 통과시켰다. 하지만 본회의 표결에 앞서 일주일 기한 FBI 수사를 거치기로 결정했다.

캐버노가 연방대법원으로 가는 길에 크고도 무거운 암초가 놓였다. 1982년 혹은 1991년 그때는 넘어갔던 것이 지금은 안 된다는 사실을 남성들은 알아야 하겠다. 우리 아들들이 알게 해야 하겠다.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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