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진화하는 신분도용 범죄

2018-09-28 (금) 조환동 부국장·경제특집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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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를 빗대 한동안 ‘기술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말이 많이 회자되었다.

그러나 요즘에는 정말 그럴까라는 생각이 든다. 하루가 빠르게 진보하고 있는 기술이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하고 편안하게 하는 점은 물론 많다.

생각해보면 전기가 개발되기 전 우리 조상들의 삶은 사실상 낮 시간대로 국한됐다. 그래서 일찍 자고 새벽 해가 뜨자마자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해가 지면 자는 것 외에는 딱히 할 것도 없었다.


전기와 통신, 교통수단과 인터넷의 발전, 무엇보다 10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도래한 스마트폰 시대를 맞아 우리의 삶은 전 세계가 하루 생활권으로 축소됐다.

그러나 기술 발전과 함께 날로 교묘해지고 진보하고 있는 각종 신분도용 범죄는 모바일 시대의 그늘이 아닐 수 없다. 이같은 추세를 반영, 최근 몇 년간 본보가 가장 많이 보도하는 기사도 각종 신분도용 범죄에 대해 알리고 피해를 방지할 수 있는 내용들이다.

한 지인의 부모는 최근 은행계좌에 있던 돈을 신분도용 범죄로 모두 잃는 피해를 당했다. 80대 고령의 이 분은 평소처럼 은행 계좌에 접속해서 잔고를 확인한 것뿐인데 얼마 후 체킹 계좌에 있던 돈이 거의 모두 증발해버린 것이다. 알아본 결과 사기범이 위조된 은행 웹사이트를 만들어 접속하게 만든 후 유저네임과 패스워드 등을 훔쳐 진짜 은행 계좌에 들어가서 10여 차례에 걸쳐 돈을 빼갔다.

지인은 “부모님이 신분도용 범죄를 당한 게 이번이 세 번째”라며 “결국 부모님이 은행 계좌를 접속하지 못하게 하고 부모님의 은행 계좌를 직접 관리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한인 노인도 비슷한 금융 피해를 당했는데 알고 보니 이번엔 패스워드가 문제였다. 자신의 영어 이름을 수년간 패스워드로 사용하면서 결국 은행과 크레딧카드 정보가 모두 뚫린 것이다. 금융 관계자들에 따르면 아직도 ‘123456’이나 ‘abcdef‘ 등 외우기 쉬운 패스워드를, 그것도 수년간 한 번도 바꾸지 않고 사용하는 한인들이 의외로 많다.

최근 몇 달간 또 다른 신종 신분도용 범죄가 극성을 부리고 있는데 이메일을 보내 “당신의 패스워드가 유출됐다. 범죄자들이 당신의 패스워드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며 이를 시정하기 위해 특정 사이트에 접속하고 수백, 수천달러를 보내야 한다고 겁을 준다. 이 신분도용 범죄가 특히 위험한 것은 이 메일을 받는 사람의 패스워드를 거의 파악하고 있어 받는 사람 입장에서는 겁이 나서 응답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한인 노인의 경우 일확천금을 노리는 사람의 심리를 이용한, 어떻게 보면 가장 흔한 금융사기 피해자가 됐다. 이들 사기범은 편지를 통해 “당신이 수백 만달러 로토에 당첨됐는데 명의 이전 등 수속절차를 위해 일단 20~40달러 수수료를 보내라”고 유혹한다.

이들의 수법은 전형적인 ‘티끌모아 태산’ 사기다. 1만명이 20달러 수수료만 보내도 20만달러, 10만명이 20달러 수수료를 보내면 200만달러를 챙긴다. 이런 수법에 유혹 당해 한 번 돈을 보내면 같은 유형의 편지가 매일같이 쏟아진다. 이들 사기범은 서로 정보를 공유하는지 일부 한인들은 비슷한 종류의 ‘당첨금’ 편지를 일주일이면 20~30개씩 받는다고 한다.


또 한인은행 등 금융권에 따르면 이들 사기범이 보내는 수십만 달러, 심지어 수백만 달러 허위 당첨금 체크를 받아 은행에 입금하는 경우도 심심찮게 발생한다.

한인사회가 고령화되고 이같이 영어에 미숙하고 컴퓨터에 미숙한 노인들 중 신분도용 피해를 당하는 경우가 많아 안타깝다. 그나마 자식이 옆에 있다면 다행이지만 많은 한인노인들은 자신의 은행계좌나 크레딧 카드 계좌에서 수십, 수백달러, 심지어 수천달러가 불법 인출돼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 매달 은행 스테이트먼트나 크레딧카드 스테이트먼트를 꼼꼼히 확인하지 않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신분도용 범죄를 일괄적으로 방어해주는 ‘마술 지팡이’는 없다는 것이다. 또 세상에 공짜는 없으며 일확천금을 보장해준다면 100% 사기로 보면 된다. 스마트폰 모바일 시대에서는 눈에 보이는 유형 재산 보다 보이지 않는 무형의 재산인 자신의 신분 정보를 눈을 부릅뜨고 지켜야 하는 것이 서글픈 현실이다.

<조환동 부국장·경제특집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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