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예수교장로회 누가교회― 김수웅 담임목사
모태 신앙인 김수웅 목사의 첫 마디는 “목사가 된 것은 결국 하나님 뜻이었다”이다.
1960년 충남 성(Bible)고를 졸업한 후 1961년 한국 신학대학에 들어가 1965년 한국 신학대학을 졸업, 그 해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러나 당시 목사들은 대부분 생활고에 시달리기 일쑤였다. 그때 신학대학 동기동창으로부터 군에 입대할 것을 권유받았다.
육군 보병학교 장교 과정을 거쳐 소위로 임관 후 강원도의 포천 탱크 소대장으로 근무하다가 1970년 월남 참전을 했다. 맹호장갑부대 소대장으로 근무하여 수많은 전투에 참여하며 참된 군인상을 보여주었다.
김수웅 대위시절 독일군사유학생 시험에 통과하여 유일한 한국인으로 1976년 독일 쾰른으로 군사 유학도 갔다. 1979년 유학을 다녀온 후 철원 보병6사단 전차대대장과 용산 미8군에 근무했다.
그렇다면 잘 나가던 군인이던 그는 어떻게 목사가 되었을까?
“살면서 세 가지의 죽을 고비를 넘겼다. 처음은 월남에서 전투 중 베트콩의 기습을 당해 목숨을 잃을 뻔 했다. 두 번째는 경춘가도에서 교통사고가 나서 죽음의 위기를 맞았다. 세 번째는 동해안 화진포 해수욕장에서 바닷물에 빠진 것이다. 아무리 헤엄을 쳐도 육지로 가지 않고 자꾸 바다 쪽으로 몸이 갔다. 같이 간 친구 중 한명이 나를 발견하여 겨우 살아났다. 세 번이나 죽음의 문턱에 있으면서 이래도 목사 안 하고 네 멋대로 살 것이냐 하는 깨달음이 왔다.”
그가 1986년 화진포에서 죽음의 고비를 당하기 전, 20살이던 장남을 사고로 잃었다. 화진포로 간 것은 큰아들을 하나님께 먼저 보낸 부부를 친구들이 위로차 데리고 간 것이다. 그래서 1988년 전역을 했고 47세 나이에 목회를 시작했으나 대대장, 중대장 등 직급이 높은 교인들과 함께 목회생활을 이어가기가 상당히 힘이 들었다.
1989년 뉴욕 이민을 왔고 미리 이민 와서 목회를 하고 있던 친구 박요한 목사를 만났다.“미국에 와서 교통사고로 오른쪽 눈이 실명되는 사고를 겪었다.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목회자의 길을 가라는 채찍질로 받아들였다” 는 그는 한국교회에서 3년간의 전도사 봉사를 했다. 1996년 5월 대한예수교 장로회 미주동부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고 누가교회 담임목사가 되었다.
2003년 앨라배마 주 베다니신학대학 목회학박사를 받았고 2007년부터 이 신학대학교 교수로 임용되었다. 김수웅 목사는 1년에 두 번 여름방학과 크리스마스 시즌에 앨라배마로 간다. 1년 동안 통신을 통해 목회학을 공부한 제자들을 만나 1주일간 세미나를 하고 목사 안수를 한다.
“현재 23년차 목회 사역 중이다. 그동안 학교를 통해 배출한 제자 목사가 30여명이다. 뉴욕, 텍사스 등 미 전국은 물론 중국, 미얀마, 터키 등에서 목회를 하고 있다.”
김정자 사모와의 사이에 오클라호마에서 사업을 하는 아들, 포코노 인근에서 자영업을 하는 딸, 4명의 손주를 두었다. 아들도 올해 베다니신학대학에서 종교철학 박사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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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