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음식을 버리는 죄

2018-09-15 (토)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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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에 다녀오느라 며칠 집을 비웠더니 냉장고에 버릴 것이 많아졌다. 누렇게 시든 채소, 귀퉁이가 썩은 과일, 기한 지난 우유, 조리한 지 오래되어 먹기 찜찜한 음식들 … 모두 버리고 나니 냉장고 안이 훤해졌다. 장을 볼 때면 항상 필요 이상으로 사는 게 문제이다. 그렇게 나는 또 기후변화에 일조하고 말았다.

허리케인 플로렌스가 들이닥쳐 동부가 비상사태를 맞고 있을 때, 서부에서는 기후변화 국제회의가 열렸다. 제리 브라운 캘리포니아 주지사 주재로 12일부터 3일간 진행된 글로벌 기후 방책 정상회의(Global Climate Action Summit)이다. 마이클 블룸버그 전 뉴욕시장이 공동의장을 맡은 회의에 전 세계의 시장들, 환경운동가들, 기업대표들 등 수천명이 참석했다.

동부의 허리케인과 서부의 기후대책 회의가 묘하게 대비되는 것은 이번 회의가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정면도전이기 때문이다. 미국은 파리 기후협약에서 빠진다고 트럼프가 지난해 발표했지만 캘리포니아를 선두로 한 주정부 시정부들은 “천만에 말씀, 미국은 여전히 기후협약 안에 있다”고 반기를 든 것이다.


불교의 윤회설의 핵심은 업(業)이다. 전생에 착한 업을 지었으면 이 생이 안락하고, 이 생에서 나쁜 업을 지으면 내생에서 나쁜 결과를 맞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행위는 그 순간이 지나면 사라지는 것 같지만 사실은 씨앗으로 남아 훗날 업보로 돌아온다는 인과의 법칙이다.

전생이나 내생을 확인할 길은 없지만 환경문제에 관한한 이보다 진리는 없다. 우리의 선대가 살면서 지은 환경에 우리가 살고, 우리가 지어서 물려주는 환경에 후대가 산다. 어느 것 하나 없어지지 않고 씨앗으로 남는다는 사실은 무섭다.

개솔린 자동차를 타고, 플라스틱 일회용품을 쓰고, 에어컨을 펑펑 트는, 21세기 우리에게 전혀 특별할 것 없는 행동들이 모여 온실가스를 만들더니 어느 순간 기후변화라는 심각한 문제를 몰고 왔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만들어내는 탄소 발자국이 훗날 우리 후손이 살아갈 지구의 기후를 결정한다.

그러니 “시간이 없다. 온실가스 배출을 최대한 줄여야 한다”는 데 뜻을 모은 것이 GCAS이다. 트럼프의 탈퇴 선언에도 불구하고, 미국에서 3,000여 도시들과 17개 주정부는 파리협약 준수를 고수하고 있다.

지구온난화 그리고 기후변화는 더 이상 부인하기 어려운 현실이다. 날로 거세지고 잦아지는 산불, 해마다 기록을 갈아치우는 폭염, 도시 전체를 수장시켜 버리는 대홍수, 빙하가 녹아내리는 북극의 이상고온 등 이상한 기후현상들이 일상화하고 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기후 방책 회의가 열리는 동안 현지의 60여 식당들은 ‘제로 푸드프린트‘ 행사를 진행했다. 푸드프린트(Foodprint)는 ‘Food’와 ‘Footprint’의 합성어. 식재료의 생산-유통-조리-소비 과정에서 발생하는 탄소 발자국 즉, 온실가스 배출량을 의미한다.
이들 식당이 ‘제로 푸드프린트’ 캠페인을 들고 나온 것은 ‘음식물’이 기후변화의 빼놓을 수 없는 주범이기 때문이다. 세계적으로 육식이 늘고 축산업이 기업화하면서 엄청난 양의 메탄가스가 발생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그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음식물 쓰레기이다.
상해서 버리고 시들어서 버리고 그냥 남아서 버리는 음식물 쓰레기가 인간이 초래하는 온실가스 총량의 8%를 차지한다. 전 세계에서 버려지는 음식물은 연간 13억 톤. 재배되고 생산되는 음식물의 1/3이 밭에서, 유통 과정에서, 소비자의 냉장고나 식탁에서 그냥 버려진다. 이는 연간 4,300만대의 자동차가 뿜어내는 배기량에 해당한다.

음식 버리기의 선두주자는 역시 미국인들. 지난 봄 연방농무부가 발표한 보고서에 의하면 미국에서는 매일 15만 톤의 음식물이 버려진다. 온 국민이 매일 1인당 1파운드씩 버리는 셈이다. 지구상에서 기아로 고통 받는 사람이 8억 명인데 이들을 모두 먹이고도 남는 양이다.


이것이 단순한 낭비로 끝난다면 그나마 다행인데, 땅에 매립되고 썩어서 메탄가스 등 온실가스를 배출하니 문제가 심각하다. ‘음식물’을 한 나라로 가정한다면 나라별 온실가스 배출 순위는 미국 1위, 중국 2위, 음식물 3위이다.

브라운 주지사는 기후변화를 막는 작업이 “거대한 암석을 굴려서 에베레스트 산꼭대기에 올리는 것” 같이 어려운 일이라고 했다. 각자 자기 몫을 해야 한다고 했다.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장거리 출퇴근을 하니 자전거를 탈 수도 없고, 날이 더우면 에어컨을 안 틀 수도 없다. 하지만 음식물이 버려지지 않게 신경을 쓸 수는 있다. 손 크게 많이 사고 푸짐하게 음식 만드는 것은 더 이상 미덕이 아니다. 필요한 만큼만 사서 먹을 만큼만 만들어 버리지 않고 다 먹기만 해도 지구를 살리는 데 일조할 수 있다.

음식 버리는 것은 생각보다 심각한 죄이다. 후손이 그 업보를 받게 된다.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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