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우울한 노동자의 초상

2018-09-12 (수)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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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대 전자상거래 업체인 아마존의 창업자인 제프 베조스가 1,500억달러(약 168조원)의 개인재산으로 세계최고 부자에 올랐다는 뉴스를 접하면서 떠올린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이론적 시조인 애덤 스미스가 250년 전 자신의 책 ‘국부론’에서 예견했던 불평등이었고 다른 하나는 얼마 전 발표된 OECD 경제보고서 내용이었다.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큰 재산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큰 불평등이 존재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한사람의 큰 부자가 있기 위해서는 적어도 500명의 가난한 사람이 있으며, 소수의 풍요로움은 다수의 빈곤을 전제로 한다”고 썼다.

경제적 불평등과 관련한 스미스의 냉철한 진단은 그대로 맞아 떨어지고 있다. 경제는 성장하고 있다는데, 성장하면 할수록 잘사는 소수와 못사는 다수는 오히려 더 극명하게 갈리고 있다. 긍정적 지표의 경제뉴스들이 쏟아져 나오지만 서민들과 노동자들은 그것을 피부로 체감하기 힘들다. 갈수록 낙오되고 있다는 절망과 초초함만 부채질 할 뿐이다.


OECD 보고서는 세계 각국의 노동자들, 특히 미국의 노동자들이 왜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는지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선진국들 가운데 저소득층 비율이 가장 높은 나라가 미국이다. 직업 안정성도 최저수준이다. 해고를 쉽게 할 수 있는 현실을 그럴 듯하게 포장한, 이른바 ‘노동 유연성’이 가장 높은 나라이다.

미국 노동자들의 척박한 처지를 가장 실감나게 보여주는 수치는 전체 국가소득(national income) 가운데 노동자들의 소득이 차지하는 비중이다. 이 비중은 갈수록 낮아져 1998년부터 2013년 사이 무려 8%포인트나 떨어졌다. 새로 만들어지는 부 가운데 점점 더 많은 비율이 기업들, 그리고 소수 자본가들 손에 들어가고 있다는 얘기다. 천문학적으로 불어나고 있는 제프 베조스의 재산은 이런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수치일 뿐이다.

OECD 보고서는 이런 미국의 경제적 현실을 초래한 가장 큰 원인으로 ‘노조의 약화’를 꼽고 있다. 단체협약이라는 노조의 우산 아래서 보호를 받고 있는 노동자는 12%에 불과하다. 선진국에서는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낮은 노조가입률이다.

노동자 하나하나는 힘없고 보잘 것 없는 존재들이다. 연대를 통하지 않고서는 스스로의 권리를 지켜낼 재간이 없다. 레이건 시대 이후 신자유주의가 지배하고 금권정치가 득세하면서 노조는 와해되기 시작했다. 개별적 노동자들의 처지는 오롯이 그 개인의 능력 문제로 환원됐다. 해고 용이성과 노조가입률 등 OECD 보고서 카테고리에서 최하위 수준인 미국보다도 더 상황이 나쁜 것으로 빠짐없이 등장하는 나라는 한국이다.

노조하면 많은 사람들은 우선 강성 이미지를 떠올린다. 금권을 쥔 세력과 이들의 기득권 지키기에 첨병 노릇을 자임한 보수정치인들과 언론에 의해 노조는 끊임없이 폭력적 이미지로 그려져 왔다. “강성노조가 휘두르는 쇠파이프만 없었다면 한국의 국민소득이 벌써 3만달러를 넘겼을 것”이라던 김무성의 ‘노조혐오’ 발언이 대표적이다. 더욱 서글픈 것은 비슷한 처지의 노동자들과 서민들이 노조혐오 프레임에 가장 쉽게 걸려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노동자들 상황과 노조가입률 간의 상관성을 언급한 OECD 경제보고서의 진단은 큰 의미를 갖는다. 진단의 타당성을 뒷받침 하듯 최근 여러 선진국들에서 노조의 중요성을 다시 평가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노조가 활성화됐을 때 경제가 활력을 되찾고 불평등이 완화된다는 실증적 연구들도 속속 나오고 있다.

프랑스는 ‘파업천국’이다. 툭하면 전국적인 파업이 일어난다. 하지만 이로 인한 사회적 갈등은 거의 없다. 프랑스 국민들은 무디거나 유독 도량이 넓어 지하철 등 공공부문 파업으로 도시 기능이 마비돼도 묵묵히 불편을 감수하는 게 아니다. 사회경제적 약자들이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수단은 오로지 연대뿐이라는 걸 역사적 경험 속에서 체득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식적 인식이 확산되지 않는 한 함께 잘사는 나라로 가는 길은 요원하고 노동자들의 미래는 암울하다.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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