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진품 우정

2018-09-11 (화) 민병임 뉴욕지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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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19일 영국 BBC 방송의 보도에 의하면 영국 고급패션브랜드 버버리가 작년 한 해 시장에서 팔리지 않은 의류와 액세서리, 향수 등 2,860만 파운드(약 422억원) 규모를 소각했다고 한다. 지난 5년 동안 그래 왔다고 하니 모두 9,000만 파운드가 불에 탄 것이다. 이유는 브랜드 가치를 보호하기 위한 것, 팔리지 않거나 과잉 공급된 제품이 암시장에 흘러들어가 싸게 팔리는 것을 원치 않아 멀쩡한 진품을 불에 태워버리는 것이다.

사실, 위조품 제조업자들은 버버리 체크 트레이트 마크를 도용한 상품을 다양하게 만들어내고 있다 맨하탄 5번가 명품거리에 저녁 어스름이 내리면 짝퉁 버버리를 비롯 명품 백들을 한보따리 땅바닥에 펼쳐놓고 파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한국에서도 최고 상품을 불로 태운 이가 있다. 바로 조선최고의 거상 임상옥(1779~1855)이다. 조선 초에 중국으로 가는 사신들은 금, 은을 가지고 가서 바꿔 경비로 썼다. 세종 때부터 금, 은 유출을 막기 위해 인삼을 가져가서 팔아 쓰도록 하였다. 그래서 개성상인들은 인삼 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쌓았다. 임상옥은 32세에 조선 최초로 국경지방에서 인삼무역 독점권을 얻었다.


그에 대한 일화는 2001년 한국 KBS 드라마 ‘상도(常道)를 통해서도 잘 알려져 있다. 임상옥이 인삼을 팔기위해 북경에 도착하자 청나라 상인들은 인삼 값을 폭락시키려고 인삼불매동맹을 맺는다. 조선으로 돌아갈 날자가 돌아오면 헐값으로 팔리라는 기대였다. 그러나 임상옥은 인삼꾸러미를 모조리 마당에 내다놓고 불을 태운다. 그러자 청국 상인들이 달려들어 인삼꾸러미를 꺼내며 팔라고 애원한다. 인삼값은 10배로 폭등한다.

임상옥이 인삼을 불태운 것은 인삼을 포기하여 빈털터리가 되더라도 자신의 삶의 원칙을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재상평여수(財上平如水) 인중직여형(人中直如衡): 재물은 평등하기가 물과 같고 사람은 바르기가 저울과 같다.’ 재물은 누구든 영원히 독점할 수 없는 것, 지나침과 모자람을 멀리해 균형을 잡는 자세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또 ‘장사란 이익을 남기기보다 사람을 남기기 위한 것이며, 사람이야말로 장사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이윤이고, 따라서 신용이야말로 장사를 얻을 수 있는 최대의 자산’이라 했다. 이 말은 신용이 재산인 미국사회에서 지금도 통용되는 원칙이다.

삼성전자도 불량 휴대폰 15만대를 스스로 불태운 적이 있다. 1995년 3월9일 삼성전자 구미사업장 앞마당에 2,000여명의 삼성전자 직원들이 집결한 가운데 마당 한복판에 15만대에 달하는 무선전화기, 팩시밀리, 키폰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불도저가 제품들을 산산조각 낸 뒤 불을 붙였다. 500억원이 재가 되었다 당시 이건희 회장은 이러한 조치를 통해 품질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것. 이후 삼성전자는 연간 3억대 이상의 휴대폰을 파는 세계 1위 휴대폰 사업자가 되었다.

브랜드 가치를 보존하고자 화형식도 서슴치 않는 명품 브랜드, 대부분 좋아한다. 내게도 명품 브랜드 루이뷔통 가방이 두어 개 있다. 도시락 가방으로 종종 이용하는데 진품과 짝퉁을 함께 들고 오면 사람들은 ‘도대체 가방 가격이 얼마야?’ 하는 눈빛이 된다. “이것은 진품, 저것은 짝퉁” 하고 당당하게 말한다.

가방쯤이야 진품이면 어떻고 짝퉁이면 어떠랴. 진품을 들었든지 짝퉁을 들었든 지와 상관없이 나는 언제나 나다. 물건이 명품이기 전에 사람이 명품이어야 한다. 친구 사이도 마찬가지. 좋은 일에 같이 기뻐해주고 슬픈 일에 진심으로 위로 해주는 사이, 그것이 진품 우정이다. 겉으로 걱정하는 척 하면서 실제로는 시기, 질투, 탐욕을 부리는 친구는 짝퉁이다.

내가 세상의 상식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언제나 내 편인 친구, 그 친구의 존재가 각박한 세상에 대해 따스한 시선을 거두지 않게 한다. 다행히 주위에 진품 우정을 지닌 이가 몇 있다. 그래서 아직 뉴욕은 살만 하다.

<민병임 뉴욕지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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