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스프링클러가 작동하는 경제

2018-09-05 (수)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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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고용, 그리고 소득격차와 관련한 경제지표가 좋지 않게 나타나면서 대통령 지지율도 크게 떨어졌다. 정책추진 동력에 빨간불이 켜지면서 위기감이 높아지고 있다. 보수언론들은 기다렸다는 듯 문재인 정부의 경제기조 때리기에 나서고 있으며 일부 언론은 건강한 비판을 넘어 악의적인 흔들기에 나선 모습이다. 이래저래 문재인 정부는 곤혹스러운 처지다.

야당과 보수언론의 공격대상이 되고 있는 경제정책은 ‘소득주도 성장론’이다. 소득주도 성장론은 최저임금 인상과 적극적인 복지 등을 통해 가계소득을 늘려줌으로써 소비증가와 투자확대를 이끌어내고 그럼으로써 경제성장의 선순환 고리를 만들 수 있다는 논리다.

소득주도 성장론을 비즈니스 일선에서 구현한 선구자적 인물은 헨리 포드였다. 그는 노동자들 하루 평균 임금이 2.34달러이던 1914년 자신의 공장 노동자들 일당을 5달러로 대폭 올렸다. 노동계는 발칵 뒤집혔으며 포드가 미친 것 아니냐는 비난이 쏟아졌다. 하지만 포드는 미친 게 아니었다. 그는 노동자들 임금을 올려주면 그들이 바로 자신의 자동차를 구입하는 소비자들이 될 것이란 걸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예측은 적중했다. 포드는 임금에 관한 통념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포드의 실험은 국가모델에서도 유효하다. 2008년 전 세계를 강타했던 금융위기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굳건하게 성장을 지속한 나라들은 임금수준이 높고 복지체계가 든든한 소득주도 성장국가들이었다. 경제의 체질이 튼튼하면 웬만한 외풍에는 전혀 흔들리지 않는다.

많은 정치인들과 언론은 지난 두 번의 최저임금 인상을 고용악화의 주범으로 지목한다. 그러면서 소득주도 성장론의 페기를 요구하고 있다. 최저임금이 오르면 당연히 고용주들에게는 부담이 된다.

그렇다고 해도 고용부진과 영세 자영업자들의 어려움을, 주 40시간 꼬박 일해도 기초생활 꾸리기조차 버거운 수준의 최저임금 탓으로만 돌리는 것은 무책임하고 교활하기까지 하다. 을-을 갈등을 부추기는 이런 주장에 현혹되다 보면 보다 근본적 문제인 경제 저변의 갑질과 불평등, 불공정 구조를 보지 못하게 된다.

최근 발표된 경제지표들은 역설적으로 왜 소득주도 성장이 시급한지를 확인시켜 주고 있다. 소득주도 성장론은 잘못된 경제구조와 체질을 바꾸자는 것이다. 체질은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는다. 증상에 따라 그때그때 꺼내드는 대증요법만으로는 경제의 근본적 체질을 변화시킬 수는 없다. 여기에는 시간이 소요되고, 체질이 바뀌는 과정에서 오히려 일시적으로 증세가 나빠진 것처럼 보이는 ‘명현현상’이 나타날 수도 있다.

얼마 전 진보지식인 수백 명은 문재인 정부에 “현재의 경제적 어려움은 소득주도 성장정책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이런 기조를 제대로 밀고나가지 못한 데 따른 결과”라고 비판하는 성명을 내놓았다. 대통령은 이 같은 고언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청와대는 상황을 엄중히 보고 있다고 밝혔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 외부로부터 거센 공격과 비판을 받으면 움찔하게 돼 있다. 순간순간의 지지율과 비판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다 보면 행보가 어지러워지면서 당초 목표에서 벗어나 엉뚱한 곳으로 가게 된다.

다행히 아직까지 국민들 대다수는 소득주도 성장정책에 지지를 보내고 있다. 한 여론조사를 보니 국민들의 60%가 소득주도 성장을 유지해야 한다고 밝혔다. 폐지해야 한다고 응답한 사람은 24%에 그쳤다. 지지국민들이 밝힌 이유는 “이제 겨우 1년이 지난만큼 기본방향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소득주도 성장정책이 효과를 내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는 걸 국민들은 알고 있다. 교묘한 논리와 이상한 기준을 동원해 소득주도 성장론을 흠집 내는데 혈안이 돼 있는 일부 정치인들과 언론보다 국민들이 더 현명하다.

잔디밭 전체가 건강하고 푸릇푸릇하려면 스프링클러로 고루고루 물을 흩뿌려줘야 한다. 스프링클러가 작동하는 경제시스템을 만들어 국민들을 고루 잘 살게 해주자는 것이 소득주도 성장론이다. 소득주도 성장은 지금까지 한국경제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새로운 길이다. 그런 만큼 지금 문재인 정부에 필요한 것은 자신들이 바른 길을 가고 있다는 방향성에 대한 확신이다.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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