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손을 잡아주세요

2018-09-01 (토) 이주희 가정상담소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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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입니다. 어떤 응급상황이신가요?” 침착한 911 전화응답자의 말에 대답한 것은 울고 있는 어린 여자아이. “엄마랑 아빠가 싸워요!”

무언가 깨지고 부서지는 소리를 배경으로 숨을 헐떡이며 비명처럼 내지른 소녀의 전화ㅍ속 목소리는 911 응답자를 바짝 긴장시킨다. 어떻게든 상황을 자세히 알아내려 애쓰는 응답자에게 소녀는 “아빠가 엄마를 아프게 해요!” “아빠가 내 동생을 넘어뜨렸어요!” 라는 단답형 대답 밖에 주지 못한다.

그리고 대답 사이사이, 소녀는 비명을 지르며 제발 경찰을 불러달라고 애원한다. 911 응답자는 경찰이 가고 있다고 소녀를 안심시키는 한편, 경찰이 갈 때까지 전화를 끊지 않도록 소녀에게 계속 말을 건다. 하지만 그 노력도 무심하게, 소녀는 비명을 지르며 수화기를 내려놓는다. 응답자는 욕설 섞인 한숨을 내쉬며 통화를 마친다.


마치 부조리극의 한 장면과 같은 이 통화는 실제 가정폭력 현장에서 걸려온 911 통화의 녹음본이다. 가정폭력의 민낯을 그대로 드러내주고 있기 때문에, 가정폭력에 대응하는 사회복지사나 경찰, 많은 교육기관들이 이 녹음본을 가정폭력에 대한 훈련자료로 활용하고 있다. 자신들이 돕고 있는 사람이 과연 누구인지 분명히 인지하도록 돕는 것이다.

그런데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이 가슴 아픈 통화가 있은 지 10년이 넘은 어느 날, 가정폭력 생존자들을 돕는 일을 하던 킷 그루엘이라는 사회복지사는 이 통화에 담긴 어린 아이는 과연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수소문 끝에 찾아낸 통화 속의 여자아이, 리사는 안타깝게도 어머니와 같이 폭력적인 남자관계에 묶여 있었다. 리사는 자신의 911 통화 당시 일어났던 상황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그런 일이 너무도 많이 일어났기 때문에.

그 후 킷과 가정폭력 생존자를 돕는 복지기관의 도움으로 리사는 자존감을 되찾고 과거의 상처를 극복하며 폭력적인 관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지금 리사는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다른 생존자들에게 용기를 북돋워주며, 특히 어린시절에 가정폭력을 경험한 사람들을 돕는 활동에 동참하고 있다.

사실 가정폭력은 70년대 80년대 한국에서는 그냥 일상적인 이야기였다. 리사를 영희로, 철수로 바꾸어 보면 그건 그대로 내 이야기 아니면 나의 옆집 이야기이다. 다만 우리는 우리에게 킷 그루엘이 필요하다는 것을 몰랐다. 아니, 그것이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라는 것도 몰랐다.

주위에서 혹은 내 가정에서 어린 리사와 영희와 철수를 외면하며, 부부가 싸우다 좀 치고 그럴 수도 있지 라고 생각하는 부부가 있다면, 그걸 보는 어린 자녀에게 자신들이 폭력을 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주길 바란다. 그 아이가 폭력을 커뮤니케이션 방법의 하나로 배우고 있다는 사실도.

누군가가 더운 여름철에도 목을 가리는 긴 옷만 입는다면, 만나기로 약속해 놓고 언제나 ‘집에 일이 있어’ 마지막 순간에 나오지 못한다면, 누군가의 배우자가 하루에도 10번씩 전화해서 배우자의 동선을 파악한다면, 한번 더 보아주길 바란다. 손을 내밀어 주길, 필요하면 언제든 전화하라고 전화번호를 알려주길, 그도 용기가 나지 않는다면 가정상담소 전화번호라도 알려주길 바란다.

세상엔 남을 도우려는 의외로 사람이 많고, 그래서 아직 희망이 있다. 서로 잡은 손이 거대한 원이 되어 도움 필요한 이들을 위한 울타리가 되어주길 바란다.

<이주희 가정상담소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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