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그의 삶은 ‘성장의 스토리’ 였다

2018-08-29 (수)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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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5일 별세한 존 매케인 연방상원의원에 대한 추모열기가 식지 않고 있다. 미국의 진정한 영웅을 잃었다는 애도가 이어지고 있다. 정치인으로서 매케인의 족적에 대해서는 평가가 일부 엇갈릴지 몰라도 그가 조국인 미국을 정말 사랑하고 항상 약자의 편에 서려했던 도덕과 원칙의 사람이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다.

매케인은 해군 조종사로서 베트남전에 참전했다가 전투기가 격추당하는 바람에 5년간 모진 포로생활을 했다. 포로생활에서 풀려나 미국에 돌아온 후에는 정치인으로 36년간 나라를 위해 봉직했다. 그에게는 ‘봉사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born to serve)이란 수식어가 항상 따라 붙는다. 왜 그런지는 그의 이력 자체가 잘 말해준다.

매케인의 삶을 베트남전과 떼어서는 생각할 수 없다. 원칙을 중시하는 그의 가치관은 군 생활을 통해 형성되고 포로생활을 통해 한층 더 견고해졌다. 매케인의 아버지가 해군제독인 것을 안 월맹은 그를 협상카드로 이용하려 석방을 제안했다, 하지만 매케인은 이 제의를 단호히 거부했다. 보통사람들 같으면 정신적으로 쉽게 무너졌을 고난 속에서 그는 더욱 단단해졌다.

매케인은 “힘든 시기를 겪는 것에는 놀라운 혜택이 있다”는 이른바 ‘외상 후 성장’의 대표적인 실증사례로 자주 언급된다. 트라우마를 겪고 나면 필연적으로 엄청난 변화가 뒤따른다. 어떤 사람에게는 자아의 뿌리가 흔들리는 부정적 변화가 엄습하지만 오히려 이런 상처를 자아를 다시 세우는 기회로 삼는 사람들도 있다.


전문가들은 외상 후 성장을 하게 되면 그동안의 습관들과 우선순위를 되돌아보게 되고, 그러면서 감정이입과 이타성이 늘어나게 된다고 지적한다. 그렇게 본다면 ‘전쟁영웅’으로 돌아온 매케인이 공적영역에 몸을 담은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수순이자 선택이었다.

36년의 공직생활을 통해 매케인은 ‘품격의 정치인’이란 평판을 얻었다. 하지만 그가 이런 평판을 얻게 된 것은 흠결 없는 정치생활을 지속했기 때문이 아니다. 인간의 품격은 완벽함에 있지 않다. 인간에게 완벽함이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다. 진정한 품격은 부족함과 실수를 통해 배우고 스스로를 더욱 성장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 만들어지고 얻어지는 것이다.

매케인 역시 정치생활에서 적지 않은 과오를 저질렀다. 1989년에는 찰스 키딩 정치자금 스캔들에 연루됐으며, 유권자를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에 사우스캐롤라이나 남부연합기 이슈에 미온적 태도를 보여 비판을 사기도 했다. 오바마와 맞붙었던 대선에서는 논란이 많던 세라 페일린을 러닝메이트로 내세우는 패착을 두었다. 사생활에서는 포로생활 중 자신을 기다리며 아이들을 키웠던 조강지처를 버려 비난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매케인이 다른 정치인들과 달랐던 것은 이런 과오를 인정하고 스스로를 비판하는데 전혀 주저함이 없었다는 점이다. 지난해 매케인이 뇌종양 수술을 받은 직후 불편한 몸을 이끌고 오바마케어 폐지관련 표결에 참여하기 위해 연방의회에 나와서 한 연설은 그가 왜 ‘품격의 정치인’인지를 보여줬다. 매케인은 ‘부족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정치를 질타하면서 “나 자신도 종종 ‘공공의 선’보다 ‘정치적 승리’를 우선시 하는 잘못을 저질렀다”고 참회했다. 노정객의 진심어린 질책과 자기고백에 의사당 안은 숙연해졌다.

매케인은 공화당원들 3분의 2가 테러리스트에 대한 물고문을 정당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고문은 옳은 일이 아니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당리당략보다 보편적 원칙과 도덕을 우선시했다. 그리고 자신이 올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했을 경우에는 그것을 시인하고 사과할 줄 알았다. 온갖 궤변과 변명으로 자신의 잘못을 합리화하는 여느 정치인들과는 달랐다.

매케인을 ‘품격의 정치인’으로 만들어 준 것은 고매한 인격과 완벽한 판단력이 아니었다. 매케인의 81년 삶은 ‘성공의 스토리’가 아니라 ‘성장의 스토리’였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부족함을 되돌아보면서 조금 더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매케인이 세상에 남기고 간 유산은 그 어떤 정치적 업적이 아니라 바로 이 같은 삶의 태도였다.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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