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9월 11일, 오전 9시 조금 지나 전화벨 소리에 수화기를 드니 여동생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빨리 TV 틀어봐. 뉴욕의 세계무역센터 빌딩이 없어졌어”
평소 우스갯소리를 잘 하는 동생인지라 아침부터 무슨 농담을 하나 생각하며 TV를 켜보았다. 여객기 2대가 시차를 두고 쌍둥이 빌딩에 돌진해서 시뻘건 불꽃과 검은 연기를 내뿜고 잠시 후 100층이 넘는 건물이 모래섬처럼 차례로 주저앉는 광경이 연속해서 방영되고 있었다. 꼭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처럼 믿어지지가 않았다.
얼마동안 망연자실 바라보다가 문득 뉴욕에 살고 있는 막내딸이 떠올랐다. 이 시간이면 틀림없이 맨해탄에 위치한 직장에 출근해 있을 것이 아닌가. 갑자기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했으나 연락이 불통이었다. 오후 4시경이 돼서야 딸로부터 전화가 걸려왔고 무사히 있으며 직장에서 많이 떨어진 곳에서 일어났다고 우리를 안심시켰다.
한인 20여명을 포함한 2,792명의 무고한 목숨을 앗아간 9.11 테러도 벌써 18년이 흘렀다. 미국은 이를 미국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하고 아프가니스탄과 이어서 이라크를 침공하여 승리를 거둔 것 같지만 아직도 총성과 테러는 사라지지 않고 이 시간에도 계속 귀중한 생명이 희생되고 있다.
통계에 따르면 그 후 5년간 테러와의 전쟁으로 전 세계에서 7만3,000명가량이 죽었고 그중 4만4,000여 명이 이라크의 민간인이다. 미군 전사자의 숫자도 2,700명 선에 이르고 있다. 결코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던 사건이었지만 망각 속으로 사라지고 세계무역센터가 서있었던 자리에는 프리덤 타워가 세워졌고 뉴욕을 찾는 관광객도, 동시다발 테러로 이용됐던 비행기도 탑승객으로 여전히 붐비고 있다. 하지만 필자가 1950년 서울에서 겪었던 여름 3개월은 7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지금도 결코 잊을 수없는 악몽으로 남아있다.
6.25전쟁 시 우리 가족은 미처 피난을 못하고 서울에 남았는데, 9월28일 수복될 때까지 공산정권 하의 3개월, 특히 마지막 한 달은 도저히 인간의 생활이랄 수없는 아비규환의 세월이었다. 연일 계속되는 공습과 포격으로 인한 주검들 그리고 하루 한 끼도 못 먹는 굶주림은 전쟁 중이라 그렇다 쳐도 그동안 쌓인 원한과 감정을 해소하려는 정복자들의 보복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첫 번째가 완장 찬 자들이었다. 해방 전후 많은 지식인이 공산주의 사상에 젖어있었으나 양식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훗날 공산주의 체제와 실상을 목격하고 대부분 사상전환을 하였는데 문제는 공산치하에서 갑자기 쥐꼬리만 한 벼락감투를 쓰게 된 자들로서 고소고발과 못 된 짓은 모두가 그들의 소행이었다. 수많은 죄 없는 양민들이 희생과 고통을 당하였다. 완장찬 자들도 수복 후 결국 처형당하거나 평생 눈총을 받으며 불행한 말로를 보내야만 했다.
두 번째로는 우익 인사와 군경, 지주계급 등 숙청 대상자들에 대한 밤낮 없는 검거와 색출작업 그리고 무지한 인민들을 동원한 여론재판이었다. 평소 선량하고 순박하게 보였지만 세상이 바뀌자 승냥이 같이 표변하는 인간들이 있었다. 사회에 불평불만과 열등감을 가졌거나 소외되어있던 자들인데 전쟁보다도 오히려 그런 자들이 더 공포의 대상이었다.
세 번째는 진실과 동떨어진 과잉 선전과 사탕발림 같은 기만술책이었다. 그들의 선동은 포퓰리즘의 극치랄까, 서울 코앞까지 진격한 유엔군을 낙동강에서 몰아내고 있다는 등 거짓 정보는 일상사였다.
그 당시를 생각하니 문득 한국의 현실이 떠오른다. 대한민국의 장래를 위해서 한국민들이 깊이 고민해야할 때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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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만연 수필가·회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