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노년의 이웃사촌들

2018-08-25 (토) 권정희 논설위원
작게 크게
오래된 독자들이 가끔 안부를 전해주곤 한다. 며칠 전에는 남가주 가디나에 사는 여성독자 K씨의 전화를 받았다.

60대인 그는 30여년 전부터 가디나에 살며 미용사로 일하고 있다. 가디나는 일본계 주민이 많은 곳. 2014년까지만 해도 하와이를 제외하고는 미국에서 일본계 인구가 가장 많은 도시였다. 이후 인근의 토랜스에 2위 자리를 내주기는 했지만, 일본계에게 가디나는 고향 같은 곳이다.

그리고 1990년 전후 그 도시에 한인 비즈니스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인접한 다른 지역에 비해 상업용 부지와 건물이 상대적으로 쌌기 때문이다. 1980년 1,000명이 채 못 되던 한인인구는 1990년 거의 3,000명으로 뛰었고, 이후 꾸준히 늘어났다. 인구 5만5,829명(2010년 센서스)의 소도시에서 아시안(26.2%)이 많으니 한인과 일본계는 종종 정다운 이웃으로 지내는 모양이다.


K씨는 미용실의 오랜 단골인 일본계 노신사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80 즈음의 그 분은 혼자 사는 노인이다. 건강이 좋지 않아 2~3년 전부터 지팡이를 짚고 다니다가 얼마 전부터는 워커에 의지해 걷는다. 다행히 운전을 할 수 있어 5~10분 거리 미용실을 자주 찾는다.

“혼자 집에 있는 게 답답하니 거의 매일 마실 오듯 찾아오세요. 미용사들이 머리도 감겨드리고 말동무도 되어 드리고 하지요.”

배우자 떠나고 혼자된 노인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자녀들은 아버지를 별로 찾지 않고, 친구들은 세상을 떠났거나 병중이어서 만날 수 없고, 이웃집과 왕래도 거의 없으니 하루 종일 적막강산이다. 노인은 친절한 한인 미용사들에게 마음을 의지하는 것 같다. 미용사들은 김치찌개나 된장찌개, 삼겹살 볶음 등 노인이 좋아하는 한국음식을 만들어다 주기도 하고, 시장 보러 갈 때 같이 가서 도와주기도 한다.

“이웃의 어른 대하듯 따뜻하게 대해드리지요. 그분이 워낙 한국사람들을 좋아해요.”
노인이 미용사들을 놀라게 한 것은 지난해부터였다. 미용실 4명의 미용사들에게 ‘고맙다’며 봉투에 1,000달러씩을 넣어 나누어 준 것이다. 그리고는 1년이 지난 얼마 전 노인은 다시 봉투에 1,500달러씩을 넣어 미용사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보답을 기대하지 않았던 미용사들로서는 ‘완전 감동’이었다.

“멀리 있는 자식보다 가까이 있는 우리가 더 좋으신 거지요. 늙어가면서는 무엇보다 따뜻한 이웃이 필요한 것 같아요.”

사람은 사람의 온기를 쬐어야 살 수 있는 존재인데, 수명은 길어지고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져 사는 현대의 환경에서 노년은 고독/고립의 동의어가 되고 있다. 고령화 사회인 일본에서는 혼자 사는 65세 이상 남성의 15%(여성은 5.2%)가 무인도에서 살 듯 살고 있다. 관련 국립연구소가 지난주 발표한 통계에 의하면 이들 노인은 2주일 동안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어 본 것이 ‘1번 이하’이다. 10여 일 동안 입도 떼지 않았거나 잘해야 한차례 말을 했다는 것이다.

그런 미래가 우리 곁으로 바작바작 다가들고 있다. 연방 센서스 보고서에 의하면 미국에서 75세 이상 남성의 1/4, 여성의 46%는 혼자 산다. 집안에서는 사람의 온기를 느낄 수 없고, 그렇다고 나가서 만날 사람도, 대화할 상대도 없는 사회적 고립이 노년의 가장 큰 적이다.


관련 연구에 의하면 외로움은 정신적 육체적 기능저하 위험을 59% 높인다. 외로움의 독성은 매일 담배 15개비 흡연에 해당한다고 하니 나이든 몸이 견뎌낼 재간이 없다. 구체적으로 사회적 고립은 우울증 위험을 높이고, 인지능력 저하를 초래하며 관상동맥질환 등 지병위험을 높인다. 사망위험이 45% 증가한다는 것은 자연스런 귀결일 것이다. 수명이 다해서 죽는 게 아니라 외로워서 죽는다.

교육계에서 오래 활동하고 은퇴한 분이 “커피 한잔 같이 마실 친구가 없다”고 하소연을 했다. 수십 년 촘촘하게 엮여있던 관계의 망들에 구멍이 숭숭 뚫린 탓이다. 노년이 되면 가장 자주 참석하는 행사가 장례식이다. 가까웠던 사람들이 속속 사라지는 것이다. 거기에 더해 자녀 가까운 곳으로 이사 간 친구, 치매로 입원한 친구, 거동이 불편한 친구, 운전을 못하는 친구 … 다 빼고 나면 커피 한잔 같이 마실 사람 없는 게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노년의 적, 고독에서 벗어나는 길은 하나다. 친구들을 새롭게 사귀는 것이다. 더 이상 지연, 학연, 직업 등 사회적 잣대에 맞춘 친구들이 아니다. 친구도 진화할 수밖에 없다. 가까이 있어서 늘 함께 할 수 있는 친구, 스스럼없이 문 두드릴 수 있는 친구, 음식 하나로 정을 주고받는 친구 … 이웃사촌들이다. 이웃 하나 잘 두면 열 자식 부럽지 않은 시대가 되었다. 가디나의 일본계 노신사가 수천 달러를 기꺼이 나누는 배경일 것이다.

<권정희 논설위원>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